과도기의 첫 단계: 꿈과 나쁜 꿈

그렇게 가까이 있었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 삶과 나라와 공동생활이 어떤 모습을 가질지 마침내 스스로 결정하려는 소망. 그리고 그와 나란히 아직도 입을 벌린 채 남아 있는 과거의 상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옛날의 부당함에 얽혀들어 있고, 활기로 가려져 있긴 해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의 불확실함이 있었다. 도대체 갑자기 모든 것이 어떻게 달라져야만 하나? 누가 어떤 자격을 가질 수 있나? 그리고 우리는 대체 어떤 언어로 말을 해야 하나?

아프리카에는 옛날의 것이 단순히 멈추고 새것이 시작되는 영(Zero)의 시간이라는 것이 없었다. 식민지 경영자도, 나라의 해방을 쟁취한 사람도 확고하게 입증된 과도기의 개념을 갖지 못했다.

물론 옛날 식민 지배자는 ‘품위 있게’ 퇴장하고자 하였다. 그들이 그것을 어떤 뜻으로 이해했든 간에 말이다. 그들은 ‘어린 나라들’에게 기꺼이 독립을 ‘주려 하였고, 마지막 말을 갖고 있었으며, 이제 자기들이 뒤에 남긴 ‘문명의 성취’에 대해 고마움이 담긴 작별 인사를 받기 원했다. 식민 지배라는 모험이 너무 값비싸고, 이미 오래전부터 비용이 많이 드는 식민 지배와 군사 기구를 동원한 것보다 더 쉽게 경제적인 의존(종속)을 통해 새로운 약탈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음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일만은 가능한 한 피하였다. “검둥이들, 이제 스스로 머리를 써보라지….” 적지 않은 영국과 프랑스의 장교들이 마지막으로 국기를 내리면서 꽉 깨문 이 사이로 저주를 퍼부었다.

그에 비해 대부분의 독립 투사들은 독립의 날을 열광적으로 축하하였다. 대부분은 그날을 국경일로 만들었다. 그러면 쉽게 전체를 개관할 수 있다. 영웅들 몇이 있고, 분명한 종지선이 있으며, 또 새로운 시작이 있다. 물론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자기들끼리 그리고 적들과도 이미 오래전부터 협상이 이루어져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망자들이 있었고, 또 그 오랜 감옥 생활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옛날 압제자가 퇴장하는 방식에 대해 거의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오로지 유럽 사람들에 의해 남겨진 ‘국가’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멋대로 그어놓은 국경선 안에는 보통 서로 다른 20개 이상의 민족들이, 이따금은 50개 이상의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또 일부 민족들은 국경선 때문에 서로 뿔뿔이 흩어졌다. 많은 유럽 사람들에게 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꿰뚫어볼 길이 없는 부족들’로 남았다. 수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유럽 사람들에게 이 민족들의 특징이란 오로지 그들이 노동을 잘하는 사람이냐 못하는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렇게 많은 것이 하루아침에 변화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언어만 해도 그렇다. 아랍어를 사용하는 이슬람의 북부 아프리카만 빼고 서부와 남부와 동부 대부분의 지역 국가들에서 유일하게 공통된 언어는 옛날 압제자의 말뿐이었다. 나라마다 제각기 독립을 쟁취해야만 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종족과 문화적 특수성을 더욱 많이 고려한 새 국경선을 미리 생각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중에서야 사소한 국경선 조정이 있었다.

모범도 거의 없었다. 어쩌면 멀리 있는 인도 정도가 모범이라 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년)가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변호사로 몇 해 동안 남아프리카에 살면서 정치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비폭력 저항 운동을 펼쳐서 1947년에 영국인들에 맞서 고국의 독립을 이루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아프리카 안에는? 서부 아프리카에 있는 작은 나라 라이베리아는 한 번도 유럽 사람들의 식민 지배를 받지 않았는데, 이 나라의 역사는 아마도 가장 고약한 경험에 속할 것이다. 그것은 억압으로 고통을 받았으면서도 나중에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는 구조를 스스로 깨뜨리는 일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가에 대한 비유처럼 읽힌다.

라이베리아-자유의 악몽, 또는 옛날의 노예가 어떻게 스스로 노예 주인이 되는가

아메리카의 노예 반대자들은 1816년에 모임을 만들고ㅡ휴머니즘의 생각에서만은 아니었지만 해방된 노예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는 해방된 노예를 아프리카로 돌려보내는 것이 가장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정확하게 어디로 가야 하나?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흑인이므로 아프리카 어딘가로 가면 된다.

어쨌든 뱃삯과 땅 살 돈이 모였다. 1821년에 한 백인 선교사가 최초의 해방 노예 무리를 데리고 서부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 남쪽 해안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영국 사람들이 비슷한 의도로 자유 도시를 시작한 적이 있는 곳이었다. 이곳 해안에는 배 만드는 사람 겸 어부로 생활하는 크루(Kru) 민족이 살고있었는데, 이들은 땅을 팔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선교사도 해방된 노예들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들은 협상을 하지 않고 자기들이 지금까지 평생 고통스럽게 경험했던 방법, 곧 폭력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총과 대포와 그 밖에도 아메리카에서 가져온 다른 수단을 동원해서 원주민을 쫓아내고 바닷가에 세운 첫 도시에 미국 대통령인 제임스 먼로의 이름을 따서 먼로비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더 많은 사람들을 쫓아내서 더욱 커진 이 해안 지역은 1822년에 ‘라이베리아’라는 이름을 갖게 됐고, 미국 총독이 지배하였다. 그사이에 1만 8,000명 정도가 된 해방 노예들은 1847년에 북아메리카의 후견에 지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면서 많은 점에서, 심지어는 국기까지도 미국을 그대로 모방하였다.

옛날 노예와 그들의 후손은 라이베리아 국경선에 살고 있던 다른 16개 민족들에 대해 스스로 노예 주인처럼 행동하였다. 커피 농장과 고급 목재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이들 민족은 아무런 권리도 없는 노동자가 되어 가장 고약한 착취를 당하였다. 이제는 자신들을 미국계 라이베리아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들 옛날 아프리카계 아메리카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3퍼센트를 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모든 권리를 장악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모든 궐기는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시장에서 커피와 목재 가격이 바닥을 치게 되자 라이베리아 정부는 미국의 자동차 타이어 제조회사 파이어스톤이 1926년부터 이 나라에 세계에서 가장 큰 고무농장을 만드는 것을 허가해주었다. 이와 더불어 염가 대매출 방식이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 철광석이 발견되면서 이런 일은 더욱 심해졌다. 그 어떤 정치적 이념도 없이 권력을 쥔 사람들은 가장 짧은 시간에 더욱 부자가 될 생각만 하면서 나라의 복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라이베리아는 지하자원이 풍부한 나라이지만, 가난해진 주민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부패한 정치가 때문에 혼란에 빠졌으며, 최근까지도 범죄 단체가 주민의 생활을 좌우하고 있다. 1990~ 2000년에만 폭력으로 사망한 시민의 숫자가 20만 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 식민 세력으로부터의 실질적인 해방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결과로 북부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 1943년에 벌써 이탈리아 사람들이 리비아에서 쫓겨났다(하지만 유엔은 이 나라의 독립을 1951년에야 인정한다). 1946년에 영국 사람들이 이집트를 떠나고, 1956년에는 모로코와 튀니지와 수단이 독립한다. 프랑스는 1954년에서 1962년까지 심각한 유혈 전쟁을 겪은 후에야 알제리에서 물러났다.

마르티니크 출신, 옛날 노예의 후손 프란츠 파농은 젊은 의사로서 알제리 독립 전쟁에 참가하였다

“프란츠 파농(Frantz Fanon, 1925~1961년)은 청소년 시절에 카리브 해의 섬 마르티니크를 떠나 프랑스로 가서 나치 독일과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에 맞서 싸웠다. 전쟁이 끝난 다음 그는 파리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하였지만,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인종주의의 원인에 대해서도 계속 탐색하였다.

프란츠-파농

스물일곱 살에 알제리 병원에서 처음으로 의사 자리를 얻었다. 1년 뒤에는 젊은 백인 프랑스 여인과 결혼하였다. 식민주의와 아직도 살아 있는 인종주의를 분석한 그의 첫 저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 프랑스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54년에 알제리에서 프랑스 식민 통치자에 맞선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프란츠 파농은 그 싸움에 동조하였다. 당국의 추적을 받는 해방 투사들을 자기 집에 숨겨주고 간호사들을 훈련시켜 독립 투사 진영에서 일하게 했다. 마침내 그는 병원 일을 그만두고 무기를 들고 싸움터에 나섰다. 하지만 의사로서의 직분도 이어나갔다. 그는 매일같이 이 잔혹한 전쟁의 끔찍한 희생자들을 보았다. 어린이와 부인들에 대해서도 전혀 배려를 모르는 전쟁이었다. 정치적 반대자를 고문하는 것은 양측 모두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1959년에 서른네 살이 된 파놓은 모로코 국경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부상이 완치된 다음 그는 한동안 가나에서 미래의 독립 알제리의 임시 대사 노릇을 하면서 이미 해방된 튀니지에 아프리카 최초의 정신과 클리닉을 세웠다. 프란츠 파농은 자신을 노린 여러 번의 암살 기도를 모면하고 살아남았지만 1960년에 백혈병에 걸렸다. 그는 미국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이 1961년 12월에 죽었다. 같은 해에 간행된 그의 책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은 전 세계의 흑인 해방 운동에 중요한 영감이 되었다. 프란츠 파농은 알제리의 독립을 보지 못했다. 그것은 그가 죽고 1년 뒤에야 이루어졌다.”

프랑스 언론이 알제리의 게릴라 전쟁을 충격으로 보도했던 것처럼, 영국 언론도 케냐의 ‘마우마우 궐기에 나타난 잔인성을 지치지도 않고 세부 사항까지 거듭 보도하였다. 이것은 알제리 독립 전쟁보다 2년 앞선 1952년에 시작된 일이었다. ‘마우마우’란 영국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로 ‘매우 혼란스런 아프리카 방식’이라는 뜻을 풍기는데, 1950년대 유럽에서는 테러를 뜻하는 유행어가 되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키쿠유족에 대해 상세한 것을 알지 못했으며, 그때까지는 케냐에서 영국인들에게 고용되어 아무 말 없이 일 잘하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다.

케냐에 있던 약 100만 명의 키쿠유 사람들이 여러 달에 걸쳐 영국 식민 세력에 맞선 비밀 궐기를 계획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비밀 엄수 맹세를 깨뜨릴 경우 누구든 죽이는 것이 옳다는 합의를 보았다. 궐기가 진짜로 시작되기도 전에 키쿠유 사람들은 자기들 내부의 배신자들을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진짜 배신자도 있었지만 그냥 배신자로 의심을 받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처형을 당했다. 영국 사람들은 처음에 화가 나서 그냥 방관만 하다가 마침내 폭력적으로 개입하였다. 3년 동안의 궐기 끝에 적어도 1만 1,000명의 키쿠유 반란자와 32명의 영국 사람이 죽었다. 주로 젊은 남자들 약 8만 명이 여러 해 동안이나 노동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키쿠유족으로서 뒷날 케냐의 대통령이 된 조모 케냐타는 이 궐기를 비판만 했는데도 1953년에 7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63년에 그는 독립된 케냐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벨기에에게 억압을 당하던 중부 아프리카 콩고에 젊은 파트리스 루뭄바(Patrice Lumumba, 1925~1961년)가 있었는데, 그의 이야기는 처음에 평화적인 정권 이양에 대한 희망을 만들어냈다. 그는 1958년에 서른세 살의 나이로 콩고의 모든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였다.

1960년 6월 30일 콩고에서 파트리스 루뭄바 

“우리는 흑인들이 자유로워지면 어떤 일을 이룰 수 있는지 온 세상에 보여줄 것이다……”

“파트리스 루뭄바는 영향력이 있는 집안 출신은 아니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스탠리빌(오늘날의 키상가니)의 우체국에서 일하면서 노조 운동에 참여하였다. 1956년에 그는 작은 횡령죄를 범했다는 이유로 1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는 콩고의 미래에 대한 책을 쓰고 더 많은 정치적 활동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파트리스 루뭄바 혼자만 자유 콩고의 통합이라는 이념을 가졌다. 그에 비해 그의 경쟁자들은 특별한 민족 무리만 후원하였다. 조제프 카사부부(Joseph Kasavubu)는 바콩고 민족을, 모이스 롬베(Moise Tschombé)는 지하자원이 풍부한 카탕가 지방을 지지하였다. 1959년 초에 벨기에 식민 정부는 콩고에서 일어나는 심각한 소요 사태에 놀랐다. 처음으로 유럽 사람들도 공격을 받았다. 이런 소요 사태의 배후에는 어떤 목적을 가진 조직이 따로 없었고, 각각의 무리가 이 나라의 지속적인 착취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키고 있었다. 벨기에 정부는 연말에 자유 선거를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여러 해가 걸리는 이양 과정의 계획을 몰래 세웠다. 식민 정부 없이도 벨기에 사람들이 경제적 이익을 확보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전혀 다르게 결말이 났다. 1959년이 흐르는 동안 콩고의 소요 사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동시에 벨기에 여론은 콩고에 더 많은 병력을 보내는 것에 반대하였다. 12월에 벨기에 사람들이 감시하는 가운데 투표가 이루어졌지만 그것은 코미디가 되고 말았다. 120개가 넘는 정당의 후보들이 난립하였고 많은 지역들이 투표를 거부하였다. 이런 대실패를 겪은 다음에 식민 정부는 처음으로 아프리카 사람들과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13개 정당의 대표자들이 브뤼셀로 초대를 받았다. 그들 중에는 루뭄바와 카사부부와 롬베가 있었다. 여기서 1960년 5월에 새로 투표를 하고, 투표가 끝난 직후인 6월 말에 독립을 인정해주기로 합의를 보았다. 벨기에는 이제 가능한 한 빨리 화약통 벨기에령 콩고’에서 벗어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콩고 사람들은 이 역사적인 순간을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 선거에서 파트리스 루뭄바가 승리하였다. 그는 콩고의 초대 총리가 되고, 카사부부가 대통령이, 촘베는 겨우 카탕가의 주지사가 되었는데 그 때문에 그는 몹시 화가 났다.

1960년 6월 30일 독립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젊은 벨기에 국왕 보두앵(Baudouin, 1930~1993년)이 콩고에 왔다. 그의 축하 연설은 너무나 단순해서 그 자리에 참석한 콩고 사람들은 그것을 도발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레오폴 2세의 업적’을 찬양하는 말로 시작하여 “벨기에가 콩고를 위해 바친 모든 희생” 이라는 말도 했다. 그리고 이제 벨기에가 콩고 사람들에게 준 신뢰가 정당했다는 것을 콩고 사람들이 보여줄 차례라는 말로 연설을 끝냈다. 대통령 카사부부는 예의 바르게 답변하였지만 왕을 위해 준비했던 감사 인사를 생략하였다. 그에 반해 루뭄바는 분노를 감추기가 힘들었고 그래서 오랜 세월에 걸쳐 콩고 사람들이 벨기에 사람들에게서 받은 치욕이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흑인들이 자유롭게 되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온 세상에 보여줄 것이라고 말을 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콩고 사람들은 오랫동안 박수를 쳤고 벨기에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벨기에 대표들이 그냥 떠나려고 했기 때문에 공식적인 오찬이 두 시간이나 미루어졌다. 그러나 마침내 추문을 더욱 키우지 않기 위해 그들은 오찬에 참석하였다.

새로운 콩고 정부는 처음부터 엄청난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기념일이 지나고 겨우 나흘 만에 병사들이 항의를 하기 시작하였다. 콩고 사람들의 장교 훈련을 마칠 때까지 과도기 동안 콩고에 남기로 한 합의에 따라 남아 있던 백인 장교들에게 콩고 병사들이 치욕을 당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루뭄바는 병사들에게 과도기 동안 자제해달라고 호소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최초의 폭동의 기미가 보이자 루뭄바는 양보하고 당시 아직 남아 있던 약 1,100명의 벨기에 장교들을 모조리 해임하였다. 이렇게 생긴 빈자리는 경험 없는 사람들로 서둘러 채워졌다. 참모총장에는 루뭄바의 개인 비서로 당시 스물다섯 살이던 조제프 모부투(Joseph Mobutu, 1930~1997년)가 임명되었다.

많은 병영에서 혼란이 일어나고 그때까지 콩고에 남아 있던 벨기에 사람들에 대한 기습이 매일 일어났다. 사제들도 강도를 당하고 수녀들이 겁탈을 당하는 판이었다. 겨우 며칠 만에 콩고에 남아 있던 대략 2만 5,000명의 벨기에 사람들이 콩고를 떠났다. 곧이어 벨기에는 새로운 군대를 콩고에 파견하였다.

7월에 모이스 촘베는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의’ 카탕가 주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루뭄바는 유엔에 원조를 요청하였고, 유엔은 곧바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루뭄바의 생각으로는 너무나 부족한 인원이었기에 그는 소련에도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벨기에에 주둔한 미국 대사는 워싱턴에 이렇게 보고하였다. ‘루뭄바는 콩고와 아프리카 전체에서 우리의 본질적인 이해를 위험하게 하고 있다. ……루뭄바 정권을 해체하고 동시에 아프리카 나머지 지역에서도 문제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또 다른 신하를…… 찾아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당시 루뭄바의 개인 비서로 루뭄바가 군대의 지휘권을 맡겼던 조제프 모부투가 이런 ‘또 다른 신하가 되었다. 1960년 9월 14일에 그는 스스로 임시 정부의 수반이 되고 소련 대사에게 48시간 이내에 이 나라를 떠나라고 명령하였다. 루뭄바는 가택에 연급되었다. 대통령 카사부부는 모이스 촘베를 새로운 총리로 제안하였다. 유엔 병사들이 루뭄바의 가택연금을 감시하면서, 암살 시도와 그의 도주를 막으려는 모부투의 군대로부터 그를 보호하였다.

그런데도 1960년 11월 말에 루뭄바는 매우 대담한 탈출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겨우 며칠 만에 두 명의 심복과 함께 모부투의 병사들에게 붙잡혔다. 전 세계로 전해진 사진들은 파트리스 루뭄바가 카메라 앞에서, 모부투가 있는 자리에서 머리를 쥐어뜯기고 매를 맞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동안 그의 운명은 불확실하였다. 마지막에 모부투는 자신의 옛 상관을 카탕가에 있는 그의 철천지원수인 촘베에게 보냈다. 1961년 1월 17일에 파트리스 루뭄바와 그의 두 심복은 끔찍한 고문을 당한 끝에 벨기에 장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당하였다. 그들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후 조제프 모부투는 여러 해 동안 미국의 후원을 받아 체계적으로 군대를 조직하고, 권력 싸움을 마친 다음 1965년에는 카사부부와 촘베를 제거하고 마침내 종신 독재자가 되었다. 바로 뒤이어 그는 파트리스 루뭄바를 ‘국민 영웅’으로 선포하였다. 1967년에 그는 ‘아프리카가 되기’ 캠페인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나라 이름은 자이르로 바뀌고, 모든 시민은 아프리카 이름을 가져야만 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모부투 세세 세코 은쿠쿠 은벤두 와 자 방가(Mobutu Sese Seko Nkuku Ngbendu wa za Banga)’라고 고쳤는데 번역하면 다음과 같은 뜻이다. ‘굽히지 않는 용기로 승리에 승리를 거듭한 강력한 전사’, 모부투 세세 세코는 다음 30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부패한 남자의 하나였다. 그리고 가장 고약한 폭군의 한 사람이었다. 1997년 5월에 비로소 그를 궁전에서 쫓아낼 수가 있었다. 자이르는 다시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나라는 아직도 수많은 소요 사태로 흔들리고 있다. 모부투는 1997년 9월에 모로코에서 망명 중에 사망했다.”

1957년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영국령 ‘황금해안’이 처음으로 독립하였다. 공식적으로는 3월 6일에 역사적인 서아프리카 왕국의 이름을 따서 가나라는 명칭을 얻었다. 당시 가나에 주어진 기회는 다른 많은 식민지 국가들의 경우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이었다. 권력 이동은 폭동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고, 농업도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물론 아주 많은 수의 학교와 병원들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1958년 12월 8일 가나에서 과메 은크루마

“아프리카 전체가 자유를 얻어야 한다. 그것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1909년에 가나의 남서부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금세공사 아버지와 평범한 농부 어머니 사이의 아들로 태어난 콰메 은크루마(Kwame Nkrumah, 1909~1972년)는 전혀 문제가 없는 지도자로 여겨졌다. 그의 부모는 가난하였지만, 그는 가톨릭 선교사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런 다음 몇 년 동안 교사로 일을 하던 그는 아프리카와 세계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또한 미국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할 것을 꿈꾸었다. 배표를 살 돈이 없던 그는 스물여섯 살 때 장님 승객으로 위장하여 해외로 가는 증기선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엄청난 고생 끝에 미국에 도착하였다. 콰메 은크루마는 이곳에서 10년 동안 살면서 대학에 다니고 일을 하였다. 자기보다 마흔 살이나 위인 W. E. B. 두 보이스처럼 흑인들의 권익을 위해 일하는 유명한 선구자들도 만났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는 박사학위도 받았다. 그는 1945년에 런던으로 건너가서 2년 동안 통합된 강한 아프리카를 지향한다는 범아프리카 이념을 위하여 일하였다. 당시 이미 서부 아프리카에서 정치적으로 활동하던 동지들이 1947년에 그에게 황금해안으로 돌아오라고 초대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무리와 정당들이 너무 얌전하다고 생각했던 은크루마는 파업과 태업을 조직하였고 그 때문에 한동안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 후에는 ‘지금 당장 독립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더욱 과격한 정당을 설립하였다. 1951년 최초의 선거 결과 그의 정당이 다수표를 얻었다.

1952년부터 영국 사람들은 ‘자기들의 황금해안에 최초의 정부를 허용하였다. 은크루마가 이 정부의 총리가 되었고 대부분의 장관은 아프리카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영국 총독이 최종 결정권을 가졌다. 불안하지만 양측이 많은 것을 배운 6년이 지난 다음 1957년에 유혈 사태 없이 정권 이양이 이루어졌다. 가나는 훌륭하게 경영되는 카카오 농장들과 풍부한 황금과 다이아몬드 광산 덕분에 상당히 안정된 국가로 여겨졌다. 콰메 은크루마는 가나의 독립이 모든 식민지의 해방을 위한 시작이 되어야 하며, 새로운 ‘USA’, 곧 ‘아프리카 합중국’을 이루어야 한다는 자신의 비전에 충실히 머물렀다. 그 밖에도 확고한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수많은 국영 기업체들을 만들어서 산업을 촉진시키고, 많은 대학들과 학교들을 건설하고 거대한 댐 건설을 시작하였으며, 그 밖에도 다른 식민지 지역의 해방 운동을 지원하였다.

대부분의 가나 사람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는 영웅이었다. 그는 지치지 않고 수많은 여행을 하면서 하나의 의회를 가진 통합된 아프리카라는 이념을 위하여 사람들을 설득하였다. 유럽 사람들도 자기들의 대륙에서 아직까지 생각지 못하던 꿈이었다. 이러한 이념을 위한 첫걸음으로서 그는 기니와 말리와 더불어 최초의 경제 공동체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가나의 열광은 그때까지 식민 정권에서 해방된 모든 나라에서 똑같은 공감을 얻지는 못했다. 1963년 5월에 정말로 ‘아프리카 통합 기구(Organisation of African Unity/OAU)’가 결성되기에 이르렀을 때, 아프리카의 모든 독립 국가가 여기 참석하였지만 은크루마의 핵심적인 이념은 거부되었다. 공동의 의회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식민지를 경영한 세력에 의해 그어진 국경선 안에 개별적인 국가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콰메 은크루마를 견제하기 위해 첫 회의 장소도 은크루마가 제안했던 가나의 수도 아크라가 아니라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가 선택되었다.

조국 가나에서는 수많은 시도가 이루어졌지만, 산업 생산이 자금을 가져다주는 것보다 국고가 바닥나는 쪽이 더 빨랐다. 물가는 오르고 생활 수준은 떨어지자, 총리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커졌다. 최초의 폭탄 공격과 태업이 나타나자 은크루마는 갑자기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섰다. 1963년에는 이미 3,000명의 정권 반대자들이 감옥에 있었다. 총리는 점점 더 독재자가 되어서 자신이 소속된 정당만 허용하였다. 1966년 라메 은크루마가 외국에 있을 때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는 1972년에 기니에서 망명 중에 죽었다.

그후 20년 동안은 앞선 정권을 뒤집어엎고 권력을 잡는 정권들이 연이어 등장했다. 나라는 점점 곤두박질쳤다. 1981년의 마지막 날에 젊은 공군 소위 제리 존 롤링스(Jerry John Rawlings, 1947년~)가 두 번이나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끝에 권력을 잡았다. 처음에는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당을 급지하였다. 그런 다음 나라 전체에 급격한 절약 정책을 명령하고 억지로지만 어쨌든 지속적으로 국제통화기금과 세계 은행의 여러 조건을 이행하였다. 이곳에서는(모든 곳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이런 조치가 효과를 발휘하였다. 나라는 점차 똑바로 서고 투자 계획을 통해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졌으며, 마침내 생활 수준이 차츰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사치는 아니라도 어쨌든 이전의 곤궁은 사라졌다.

1992년에 두 번째로 민주주의를 시행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가나에서는 그냥 ‘제이제이(J. J.)’라고 불리는 제리 존 롤링스는 정당을 설립하고 조심스럽게 준비하여 선거에 나섰다. 외국의 개입이 없이 모든 가나 사람이 선거가 자기들의 일이라고 여겼다. 군복을 벗은 시민 롤링스는 자유 선거에서 58퍼센트의 표를 얻어 민주적인 대통령이 되었다. 이제부터 그는 모든 민주적 규칙을 지켰으며, 헌법에 정해진 대로 두 번의 임기를 끝내고 다시는 취임하지 않았다. 2001년부터 존 아제쿰 쿠퍼(John Agyekum Kufuor, 1938년~)가 가나의 새 대통령이다. 아직도 할 일이 많고 경제는 바라는 만큼 꾸준히 안정된 것은 아니지만, 가나는 자기만의 길을 가고 그렇게 해서 이미 이룩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을 정도로 성공한 아프리카 국가의 예로 꼽힌다. 1997년에 이 나라 사람들의 커다란 환호 속에서 가나 사람 코피 아난(Kofi Annan, 1938년~)이 유엔 총재로 선출되었다. 뉴욕의 유엔 본부에서 성공적으로 일을 한 덕분에 그는 2001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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