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지배와 헤레로족의 저항

1486년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유럽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나미비아 해안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만난 것은 주로 수천 년 전부터 그곳에 자리 잡고 있던 코이코이족과 뒷날 이쪽으로 합류한 다마라족이었다. 길게 뻗은 거대한 나미브 사막에서 나미비아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16세기에 처음으로 반투어를 쓰는 오밤보족이 북쪽에서 이쪽으로 오고 뒤이어 헤레로(Herero)족과 나마(Nama)족이 소 떼를 몰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최초의 독일 사람들은 1842년에 작은 선교 거점을 빈트회크(뒷날 나미비아의 수도)에 세웠다. 그것이 다른 독일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1883년에 브레멘 상인 아돌프 뤼데리츠가 나마 사람들에게서 약 16킬로미터 길이의 해안 지대(뒷날 뤼데리츠 만)를 영국 돈 100파운드와 총기 200정을 주고 취득하였다. 1884년에 말도 안 될 정도로 적은 비용으로 ‘구입’을 계속한 결과, 이 지역은 해안선 100킬로미터 이상과 내륙으로 30킬로미터 이상에 이르는 거대한 땅으로 확장되었고, 베를린의 콩고 회의 이전에 이미 ‘독일령 서아프리카’라는 이름으로 ‘독일 제국의 보호구역’으로 선포되었다. 1892년에 마침내 독일 식민 지배자들은 구입 따위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고 해안선 길이 1,600킬로미터에 이르는 총 80만 제곱킬로미터의 땀을 합병하였다. 오늘날 나미비아 영토 거의 전부에 해당하는 땅이다. 1878년부터 영국인들이 점령하고 있던 이른바 ‘고래해안’만 예외였다.

이어지는 기간에 나마 사람들은 독일 사람들은 그들을 경멸하는 뜻으로 ‘호텐토트’라 불렀다―강제로 정복되고, 많은 헤레로 사람들은 그들의 목초지에서 쫓겨났다. 여기 덧붙여서 가축 페스트까지 발병하면서 아주 짧은 시간에 나마와 헤레로의 가축 25만 마리가 죽었다. 그러자 두 민족은 더욱더 독일 사람들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헤레로의 작은 추장 다니엘 카리코(Daniel Kariko)는 당시 독일 식민 지배자들에게서 겪은 경험을 서술한다

“우리 민족은 독일 상인들에게 철저히 빼앗기고 속고 가축도 강제로 빼앗겼다. 우리는 두들겨 맞고 구박을 당하고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독일 경찰은 우리를 보호하지 않고 상인들의 뒤만 봐주었다.

상인들은 계속 찾아와서 물건들을 내놓았다. 소 페스트가 많은 가축들을 앗아갔기 때문에 이제 내놓을 소가 없다고 말하면 그들은 우리에게 외상을 주겠다고 했다. 우리가 물건을 안 사겠다고 거부하면 상인들은 물건을 내려놓고 가면서 언제든 우리가 원할 때 돈을 내면 된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몇 주가 지나면 상인이 다시 와서 돈이나 가축을 요구하였다. 그런 다음 가장 좋은 소를 골랐다. 이따금 어떤 사람의 빛을 대신해서 남의 소를 가져가기도 했다. 우리가 이의를 제기하면 경찰이 와서 매질과 총질로 위협하였다.”

많은 수의 헤레로와 나마 사람들이 완전히 가난해져서 독일 사람들의 농장이나 공장, 나중에는 광산에서 싸구려 노동자로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해안에서 수도인 빈트회크에 이르는 철도 건설 같은, 큰돈을 들인 공공부문 건설을 위해 일을 해야만 했다. ‘독일령 남서 아프리카’의 총독 테오도르 폰 로이트바인(Teodor von Leutwein)은 “헤레로 사람들이 새로운 식민지 질서에 놀라울 정도로 훌륭하게 적응하고 있다.”고 베를린에 보고하였다. 1896년에 독일인 거주자는 2,000명 정도였는데, 이렇게 좋은 소식을 들은 후인 1903년에는 이 숫자가 4,700명으로 껑충 뛰었다.

나마와 헤레로 사람들이 그를 ‘특별히 공손하게 대했음을 알려주는 폰 로이트바인 총독의 증언이 여럿 남아 있다. 그에 반해 독일 주민들이 나마와 헤레로 사람들에게 행한 고문과 폭행의 보고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런 폭행에 대해 독일 사람들이 책임을 지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폰 로이트바인 총독은 개인적인 자리에서 이 나라 사람들의 야만적인 행동 방식’을 말하곤 했지만 총독으로서 그런 행동을 막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904년 1월 12일에 헤레로 사람들은 독일 사람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폭력적인 항거를 시작하였다. 겨우 며칠 만에 작은 헤레로 무리들이 아주 멀리 띄엄띄엄 떨어져 있던 독일 농장들을 습격하여 약 100명의 독일 거주민을 죽였다. 사망자 중에는 가장 많은 미움을 받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까지 당했던 온갖 모욕이 이 기습사건에서 밖으로 터져 나왔다. 독일 남자들은 칼에 찔리거나 몸을 이리저리 찢기고 심한 고문을 받은 다음에야 죽임을 당하곤 하였다. 그러나 어린이나 여자가 살해된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선교사나 다른 유럽 사람들도 한 명도 죽지 않았다.

헤레로족의-추장-사무엘-마하레로

헤레로의 대추장 사무엘 마하레로 (Samuel Maharero, 1854~1923년)가 1904년 궐기에 앞서 나마족과 다른 아프리카 민족 무리의 지도자들에게 호소하다:

“차라리 우리 함께 모여 죽자. 압박과 감옥과 온갖 다른 방법을 통해 죽지는 말자. …… 그 밖에 나의 소원은, 우리 약한 민족이 독일 사람들에게 맞서 일어서는 것임을 여기서 알리는 바이다. 다른 것은 그 무엇도 우리에게 소용이 없다.”

헤레로의 작은 추장 다니엘 카리코가 뒷날 서술한 내용:

“우리 추장들은 비밀 집회에서 독일의 모든 여자와 어린이의 목숨을 보호하기로 결정하였다. 선교사도 보호를 받아야 한다. 오직 독일 남자들만 우리의 적으로 간주하였다.”

궐기는 겨우 몇 달 동안만 계속되었는데도 많은 독일인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그들 중 일부는 임시로 농장을 떠나 독일 군대의 보호를 받았다. 폰 로트바인 총독이 협상을 제안하고 있었지만 몇몇 독일인 거주자들은 이미 개인적인 처형을 시작하여 ‘검둥이들을 어디서 만나든지 무조건 죽였다. 1904년 6월에 독일에서 로타르 폰 트로타(Lothar von Trotha) 장군이 지휘하는 지원부대가 도착하였다. 그는 ‘강경 진압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짧은 전투를 한 다음 병사들을 동원하여 약 8,000명의 남자들과 1만 6,000명의 어린이와 여자들이 모여 있는 워터버그 근처의 가장 큰 헤레로 진영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물도 없는 오마헤케 광야로 내쫓았다. 250킬로미터 이상에 걸쳐서 군대의 포위망이 펼쳐졌다. 사막에서 밖으로 도망칠 길은 거의 없었다. 이렇게 민족 살해가 자행되었다.

로타르 폰 트로타 장군은 1904년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독일군 대장인 나는 이 편지를 헤레로 민족에게 보낸다. 헤레로 사람들은 이제는 독일의 신하가 아니다. 그들은 병사들을 죽이고 훔치고, 상처 입은 병사들에게서 귀와 코와 다른 신체 부위를 잘라갔다. 그리고 비겁한 탓에 이제는 싸우려고도 하지 않는다……

헤레로 민족은 이제 이 나라를 떠나야 한다. 만일 헤레로 민족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무력을 동원하여 그것을 강요할 것이다. 무기를 가졌든 안 가졌든, 소 떼를 가졌든 안 가졌든 독일 국경선 안에 있는 헤레로 민족은 누구든지 총격을 받을 것이다. 나는 여자들이나 어린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그들을 자기 민족에게로 돌려보내거나 아니면 그들에게도 총격을 명할 것이다.

서명: 강력한 황제의 장군, 폰 트로타”

이러한 민족 살해의 명령이 내려지고 두 달이 지난 다음 베를린에서는 이 명령을 취소하였지만 이미 헤레로 사람들에게 미친 결과는 끔찍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헤레로 사람들이 독일 장군이 내린 이 명령과 또 다른 민족 살해 전략으로 살아남지 못했다.

독일 군대를 위해 발자국 추적자로 일하던 아프리카 사람 잔 클로에테(Jan Cloete)가 워터버그의 헤레로 추방을 목격한 것을 증언한다:

“나는 헤레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던 워터버그 근처 하마카리에 있었다. 전투가 끝난 다음 독일군 손에 떨어진 모든 남자와 여자와 어린이는 상처를 입었거나 그렇지 않거나에 상관없이 무자비하게 살해되었다. 독일군은 다른 사람들을 추적하였다. 헤레로 남자들 대부분은 무기가 없었고, 더 이상 싸울 능력도 없었다. 그들은 오직 가축을 끌고 도망칠 생각뿐이었다.

하마카리에서 멀지 않은 물 웅덩이 근처에서 우리는 야영을 하였다. 독일 병사 한 사람이 덤불숲에서 약 9개월쯤 되는 사내아이를 발견하였다. 아기는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병사는 아기를 우리가 있는 진영으로 데려왔다. 병사들은 원을 이루더니 마치 아기가 공인 것처럼 서로 던지고 받는 놀이를 하였다.

아기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상처를 입어서 점점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얼마 지나자 병사들은 지쳤고 그러자 한 병사가 검을 총에 꽂으면서 자기가 아기를 받겠노라고 말했다. 아기는 높이 던져졌고 아기가 떨어질 때 그가 총검으로 아기를 받았다. 아기 몸에 총검이 꽂혔다. 아기는 몇 분 만에 죽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독일 병사들은 큰 소리로 웃으면서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나는 너무나 비참한 기분과 역겨움에 머리를 돌렸다. 물론 나는 그들이 모두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워터버그 사건이 있고 나서도 한참이나 망설인 다음에 나마족은 당시 거의 여든 살이 다 된 추장 헨드릭 위트부이(Hendrik Witbooi, 1825~1905년)의 지휘 아래 독일군에 맞서 일어났다. 1,500명도 안 되는 사람들 중에 절반 정도만 총으로 무장을 하였는데도 헨드릭 위트부이 추장은 계속 새로운 게릴라 기습으로 1만 5,000명이 넘는 독일 군대를 긴장시켰다. 나미비아 남쪽 넓은 지역은 거의 1년 동안이나 독일 사람들에게는 ‘안전하지 않은 지역이었다. 1905년 10월에 늙은 추장은 독일 보급부대의 기습 공격을 지휘하다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나마족의 게릴라 공격은 그후로도 거의 2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지만 트로타 장군은 1905년 11월에 ‘승리하고 독일로 돌아가서 황제에게 훈장을 받았다. 헤레로족과 나마족의 궐기는 독일 정부에 상당한 재산 손실을 가져왔고 1만 7,000명의 병사를 투입하게 하였다.

살아남은 헤레로족과 나마족 수천 명은 1905년부터 이른바 노동 수용소에 감금되었으며,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1911년에 인구 조사를 해본 결과 (전에 약 10만 명이던 사람들 중에서) 7만 5,000명 이상의 헤레로와 나마 사람들이 독일의 민족 살해 정책으로 목숨을 잃었음이 밝혀졌다.

1998년 독일 대통령 로만 헤르초크(Roman Herzog, 1934년~)가 1990년부터 독립한 나미비아에 국빈으로 방문했을 때, 헤레로족과 나마족에 대한 민족 살해를 근거로 오늘날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보상하라는 요구를 받고서 이렇게 말했다. “독일 식민지 정부와 헤레로 민족 사이의 대립이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헤레로족에 대한 재정적 보상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독립한 나미비아 정부도ㅡ삼 누조마(Sam Nujoma, 1929년~) 대통령ㅡ헤레로족의 요구를 후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당시 고통을 받은 유일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헤레로족 대변인이 말한 것처럼 이런 정책 뒤에는 오늘날 독일 정부를 고려한 것이 아니라, “삼 누조마가 헤레로족에 대한 거리 두기 정책을 펼치는 것과, 그 밖에도 전통적으로 자기를 추종하는, 이 나라 북부의 다른 민족 무리를 선호하는 탓”이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