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파도: 선교사와 원조자

맨 먼저 상인과 모험가들이 왔다. 이어서 기독교의 영혼의 구원자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한동안은 그 반대도 있었다. 어쨌든 핵심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아프리카의 세속 지배자와 정신적 지배자 사이에서 아주 훌륭한 협동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가난해지고 권리를 잃어버리면, 선교사가 와서 유럽 사람들의 양심의 가책을 달래주고 동시에 아프리카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가난할 뿐만 아니라 가난함 속에서도 평화를 지니고 살도록 도움을 주었다.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 널리 알려진 속담은 다음과 같다. “백인들이 이곳에 왔을 때 그들은 《성서》를 갖고 있었고 우리는 땅을 가졌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성서》를 갖고 그들이 땅을 가졌다.”

물론 현실은 그보다 복잡하다. 아프리카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을 비판하는 교회 단체와 선교사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선교사 학교를 다니는 것이 사회적 출세를 위한 유일한 가능성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 비쌌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없는 공동체들이 서로 대립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나이지리아의 역사가 돈 오하디케(Don C. Ohadike)는 이보족(Igbo)과 유럽의 기독교도들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이보 사람들은 최초의 선교사들에게 화해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이보 사람들의 종교는 평화주의이고 다른 민족들의 종교적 관점을 존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보 사람들은 기독교도들의 말을 참을성 있게 경청하고, 선교사들도 자기들의 관점에 대해 똑같은 존경심을 보여주리라 기대하였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이보 사람들은 선교사들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치누아-아체베

나이지리아의 작가 치누아 아체베(Chinua Achebe, 1930년~)는 현재 미국에서 아프리카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일하는데, 1958년 발표한 소설 《모두 뿔뿔이》에서 최초의 백인 선교사 브라운 신부가 주인공 오콘쿼(Okonkwo)의 고향 마을인 이보 마을 우무오피아에 온 이야기를 서술한다:

“이런 방법으로 브라운 신부는 이 종족의 종교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정면 공격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래서 그는 우무오피아에 학교와 작은 병원을 세웠다. 그리고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라고 간곡히 청했다. 하지만 처음에 사람들은 하인이나 게으른 아이들만 보냈다. 브라운 신부는 간청하고 논박하고 예언하였다. 그는 읽고 쓰는 법을 배운 남자와 여자들이 미래의 지도자들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무오피아의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면 낯선 사람들이 와서 그들을 통치하게 될 것이다…… 마침내 브라운 신부의 말이 먹히기 시작하였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학교에 와서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신부는 러닝셔츠나 손수건 따위를 선물해서 그들을 격려해주었다. 배우러 오는 사람 모두가 젊은 사람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서른 살이나 되었고, 그보다 더 나이든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오전에는 농장에서 일을 하고 오후에는 학교에 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서 사람은 이 백인의 약이 효과가 더 빠르다고 말하게 되었다. …… 겨우 몇 달 만에 누구든 심부름꾼이나 서기로 만들 수 있었다. 학교에 오래 남은 사람들은 교사가 되었다…… 처음 우기(雨期)가 닥쳤을 때 오콘쿼는 우무오피아로 돌아왔다. …… 그가 멀리 떠나 있는 동안 부족이 너무나 변해서 그는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사람들의 눈에는 새로운 종교와 정부, 사업뿐이었다. …… 오콘쿼는 깊은 슬픔을 느꼈다. 그것은 개인적인 슬픔이 아니었다. 그의 눈에 이제 뿔뿔이 흩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부족 때문에 슬펐다…”

베를린에서 콩고 회의가 열리던 1884년에 교황은 프랑스 추기경 샤를 라비주리(Charles Lavigerie, 1825~1892년)를 아프리카 대륙 총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는 1867년부터 이미 알제의 대주교였지만 머지않아 그것이 이름뿐인 자리임이 드러났다. 북부 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들은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노력에 매우 완강하게 저항하였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의 교황 대리인은 대부분의 신앙의 동지들과 마찬가지로 머지않아 사하라 남쪽 아프리카, 곧 ‘신이 없는 이교도의 아프리카, ‘검은 아프리카’로 관심을 집중하였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좋은 의도로 왔든 나쁜 의도로 왔든 간에, 아프리카 전통 종교에 대해 무지하다는 점에서는 모두 똑같았다. 그들은 그것이 ‘우상 숭배’, ‘유치한 신앙’이고 진지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극소수의 수도사들과 수녀들만이 약초 지식을 알아보고 그것을 자기들이 만난 아프리카 사람들에게서 배웠다. 일부 선교사들은 언어학자들이 관심을 갖기 전에 아프리카의 언어들을 서술하여 그것을 이해할 준비를 하였다. 그들의 동기가 기독교 신앙을 더욱더 전파하기 위해서라 하더라도, 이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문화에 관심을 갖고 열중하는 일은 드물지만 양측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갈등이 생기면 무조건 백인 편만 들지 않고 중재자로 나서는 선교사들도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기독교의 전파는 많은 아프리카 사람들의 자화상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와 아프리카 사람에 대한 유럽의 생각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 색채를 지닌 어휘들은 – 완강한 인종주의자들의 기독교적 색채를 띤 선언만 빼고는 – 언제나 선량한 의미를 지닌 것이고, 또한 도움을 주고자하는 사람의 우월한 입장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처음 기독교를 전파할 때 나타난 다양한 사고방식을 이해하게 되면,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원조 형식을 깨닫게 된다. 이웃 사랑의 정신에도 불구하고 이런 원조 형식은 흔히 대화나 동반자 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건 원치 않건 간에 구원자라는 태도와 의존을 장기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유럽 사람들이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했다는 확실한 예가 바로 ‘밀림의 의사’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년)이다. 그는 서아프리카 가봉에 세운 랑바레네 진료소에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1954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독일과 다른 유럽 국가의 많은 학교들이 그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그의 공로를 줄이려는 생각은 없지만, 이제는 그의 행동의 관점을 더욱 정밀하게 관찰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그에게 아프리카 사람들은 대등한 동반자가 아니었다. “나는 너의 형제다, 그러나 너의 형이다.”라는 것이 그가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설명할 때 쓴 말이었다.

그는 ‘검둥이들’이 일을 끝까지 마무리하게 하려면 그들을 감독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에 나는 일당 노동자를 고용하여 병원 옆에 오두막을 한 채 짓도록 하였다. 내가 저녁때 와보면 전혀 아무 일도 진행되어 있지 않았다. 사흘짼가 나흘째 되는 날에 내가 화를 내자 한 검둥이가 내게 말했다. ‘박사님, 우리한테 소리치지 마십시오. 당신 책임입니다. 당신이 우리 옆에 있으면 일을 할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병원에서 환자들 곁에 있으면 우리끼리는 아무 일도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1920년에 쓴 글이다. 그의 전기를 쓴 사람은 2001년에 이 전기의 15판을 내면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그것은 자연의 아들이 지닌 정신적 태도 탓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신체적인 약탈을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 자기의식의 발전에는 더욱더 나쁜 일이지만 언제나 똑같은 유럽의 주제, 곧 “우리가 너보다 더 가치 있고 더 배웠고 영리하고 문명화되었다!”라는 태도를 통해 얼마나 많은 굴종을 겪었던가. 공개적인 만남에서 이런 건방진 태도가 나타나는 경우 반항심이 자라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건방진 태도가 도움과 원조의 제안으로 가려지게 되면 알아보기가 어렵다. 굶주림과 질병으로 정말 고통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그래서 1883년에 젊은 독일 사람 하나는 나마족에 대해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이 민족은 진지한 노동을 결심하기 전에 굶어 죽는다. 최근에 어떤 선교사가 이 종족과 일을 하려면 최선의 의지를 가진 경우 욕설을 내뱉지 않는 정도라고 말했다.”

또 다른 사람은 1904년에 헤레로족의 궐기에 대한 보고서를 읽은 다음 빌헬름 2세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절대로 검둥이들이 승리하게 놓아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지금도 아프리카가 사랑하는 신의 것이 아니라 자기들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승리한다면 대체 어디로 가겠습니까.”

2002년 11월에 가나의 수도 아크라에서 아프리카 도서 전시회가 열렸을 때 아마 아타 아이두(Ama Ata Aidoo)가 의장으로 있는 아프리카 여성 작가들의 회의도 열렸다. 그녀는 가나의 전직 교육부 장관이기도 하다. 현재 그녀는 아프리카 여성 작가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의 하나로 아프리카와 미국의 대학에서 문학 강의를 한다. 여성들을 격려하여 그들이 자기들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도록 만드는 것이 그녀의 관심사이다. “옛날에 우리의 것이었다가 식민 지배에 의해서 산산이 부서지고 기독교에 의해 약화되었다가 이제 천천히 다시 우리 것으로 만들어나가는 문화를 위해서 말이다. 아마 아타 아이는 회의의 휴식 시간에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식민 지배자와 거짓 선교사를 쫓아내는 것이 곧 자유롭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은 정말 힘든 교훈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아프리카의 다양성이야말로 가치 있는 것임을 다시 깨닫는 것, 독립과 자유를 통합하는 것이 여자와 남자에게 아주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 아직도 과제로 남아 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온갖 억압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사람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인간의 생명에 대한 가장 큰 존경의 가르침으로 바꾸는 것에 성공했음을, 남아프리카의 성공회 소속 데스먼드 음필로 투투 주교(Desmond Mpilo Tuto, 1931년~)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람은 드물다. 1984년에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배부르게 먹이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먹을 것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의 구호단체들이 너무 조금 너무 늦게 내놓는 것을 양철그릇에 받으려고 끝도 없이 길게 줄서서 지나가는 바짝 야윈 인간들의 모습을 매일 본다. 우리는 언제나 배우게 될까, 이 지구상의 인간들은 언제쯤이나 일어나 외치게 될까, 이제 충분하다고. …… 인간이 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무한히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배우게 될까, 그리고 인간을 그보다 못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일이며, 이런 모독이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언제나 배우게 될까? 다른 사람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사람은 스스로 인간성을 잃어버린다. 억압은 억압받는 사람보다 더 많지는 않더라도 그와 똑같이, 억압하는 사람의 인간성도 없애고 만다. 양쪽이 다 정말로 자유로워지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한다.”

아프리카의 종교적 관용(=톨레랑스)의 모범은 유럽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가장 인상적인 예 하나는 1960년에 독립한 서아프리카 세네갈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세네갈 국민의 90퍼센트가 이슬람교도지만 그곳에는 20년 동안이나 아프리카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가톨릭 대통령 레오폴드 세다르 셍고르의 행정부가 있었다. 1981년 이후로 그의 후계자가 된 아브 디우프(Abdou Diouf, 1935년~)는 가톨릭 여성과 결혼한 이슬람교도이다. 2000년까지 계속된 그의 통치 기간에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장관들이 있었다.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와 존경의 몸짓으로 이슬람교도 축제에는 기독교 장관들이 파견되었다. 프랑스에서 열리는 기독교 축제에는 디우프 대통령 자신도 여러 번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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