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와 두 번의 세계 대전

두 번의 세계 대전은 유럽에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아프리카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유럽 사람들은 수많은 아프리카 사람들을 전쟁에 끌어들였다. 이들에게는 권리에 대해서는 아예 말하지 않더라도 전쟁을 피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프리카가 수많은 갈등과 전쟁의 대륙이라고 말을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전쟁들은 유럽에서 시작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론 그렇다고 아프리카에서 너무나도 많은 끔찍한 전쟁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옛날부터 문명화되어 있었다는 유럽의 자기 정당화는 고쳐야만 한다.

여기서 특별히 고통스러운 것은 유럽의 식민주의와 인종 차별적 태도가 보수주의나 자본주의 혹은 극우 그룹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이 1904년 암스테르담에서 ‘제2차 국제’ 집회를 열었을 때 그들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자기 나라 노동자들을 위해 모든 일을 다 하기로 약속하였지만,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던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약탈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비판도 없이 인정하였다. 폐회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은 말도 들어 있다. “우리 회의는 문명 국가의 주민들이 저급한 개발 단계에 있는 나라들에 정착할 권리를 인정한다.”

1917년 10월의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다음, 혁명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Wladimir Iljitsch Lenin, 1870~1924년)은 식민 정책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소련 차르 제국에 승리를 거둔 다음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의 식민지들의 해방을 새로운 공산주의 소련의 공식적인 정책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호소는 뒷날 젊은 아프리카 자유 투사들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나중에는 새로운 후원자 태도의 원천이 되었다. 물질적인 지원이 이기심 없이 이루어질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식민지 경영 국가들은 특히 영국과 프랑스에 맞선 독일-아프리카에 있는 ‘자신들의 소유를 지키기 위해서도 싸워야 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분명하였다. 1914년 8월에 이미 영국 외무부는 다음과 같은 비밀 지령을 내렸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많이 독일 식민지를 접수한다. 평화협상이 진행될 때 담보로 삼기 위해서이다.” 전쟁 첫해에 벌써 대부분의 독일 식민지에서 이 계획이 성공하였다. 다만 ‘독일령 동아프리카만 예외였다. 그 지역만 상대적으로 적은 독일 군대가 약 1만 3,000명의 고용된 아프리카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전쟁 마지막까지 대략 16만 명의 영국군을 계속 새로운 싸움에 끌어들이면서도 결정적으로 패배하지 않았다.

병사나 짐꾼이나 아니면 다른 어떤 기능을 맡아서든지 약 200만 명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유럽 사람들의 전투 행위에 직접 끌려 들어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 중 약 20만 명이 유럽의 주인들을 위해 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처음에는 약간이라도 더 많은 수입을 얻기 위해 무기를 잡기로 자원한 아프리카 사람들만 전투에 참가하였지만, 1915년 이후로 유럽 사람들은 수많은 아프리카 남자들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전쟁이 끝날 무렵 유럽 사람들이 끔찍한 인명 손실을 한탄하였을 때 그들은 유럽에서 아프리카 병사들을 적군에 마주 세워 싸우게 하면 어떨까 고려하였다. 영국 참모총장의 이런 질문에 대해, 경우에 따라 “중동 지방에서 생각할 수 있는 일이긴 해도 “유럽에서 독일군에 맞서게 해서는 안 된다.”는 답변이 나왔다. 프랑스 사람들은 그런 고려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동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의 식민지에서 45만 명의 아프리카 병사들을 데려다가 독일 전선으로 보냈다. 그리고 일부 소대는 전쟁이 끝난 다음 독일 사람들이 몹시 화를 내는데도-라인란트 점령에 참가하였다.

아프리카계 미국 학자이자 범아프리카주의 창시자의 한 사람인 윌리엄 에드워드 버거트 두 보이스(William Edward Burghardt Du Bois, 1868~1963년)는 1920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의 잔인함을 이렇게 서술하였다

“그것은 미쳐버린 유럽이 아니다. 그것은 궤도에서 벗어남이나 광기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유럽이다. 오늘날 세계는 무역이다. 세계는 가게로 변해버렸다. 삶이라는 것은 생활비를 번다는 뜻이다. …… 세계 전쟁이라는 끔찍한 촉매로 인해 백인들은 우리를 때리고 비방하고 죽이는 일에서 임시로 등을 돌리고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는 데 열중하였다.”1919년에 패전국이 된 독일은 아프리카의 모든 식민지를 포기해야만 했다. 국제연맹(오늘날 UN의 전신)은 처음에 독일 식민지의 통치를 형식적으로만 떠맡았다가 실질적으로는 승전국인 영국·프랑스·벨기에 둥지에 나눠주었다. 국제연맹은 이 기회에 유럽 사람들에게 식민지 지역이 ‘현대 세계의 경쟁적인 조건 아래서 자기 발로 설 수 있게 될 때까지 식민지를 통치하라고 위탁하였다.

선교 사업의 이념이던 것이 이제는 정치적인 의도가 된 것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어린이이기 때문에 ‘현대 민족들의 공동체의 완전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교육적인 노력이 이루어졌다. 많은 식민지 행정부들은 특별히 선택된 소수의 아프리카 사람들에게(이런 특혜는 아프리카의 여자들에게는 거의 예외적으로만 주어졌다) 장기적인 학교 교육을 받을 길을 열어주었다. 1930년대 말까지 1억 6,500만 인구 중 대략 1만 1,000명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고등 교육을 받았다.

초기에 독립 전쟁에 참가하고 서른여섯 살이 되던 1958년에 기니의 초대 대통령이 된 아메드 세쿠 투레(Ahmed Sékou Touré, 1922~1984년)는 자신의 학창 시절을 이렇게 말한다

“식민지 학교에서 우리가 사용한 교과서는 우리에게 드골 장군의 전투에 대해 알려주었다. 우리는 잔 다르크와 나폴레옹의 생애와 프랑스 백화점의 목록, 라마르틴의 시와 몰리에르의 희곡 등을 배웠다. 마치 아프리카는 한 번도 역사란 것을 가져본 적이 없고, 과거도 없고, 지리적인 존재나 문화적인 삶도 없었던 것 같았다. 우리 학생들은 얼마나 완벽하게 문화적으로 적응하느냐에 따라서만 인정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이전에 유럽은 여러 번 경제 위기로 흔들렸다. 그 결과 높은 실업률이 나타났다. 1929년 세계 경제 공황 이후로는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서 농부들에 대한 약탈이 얼마나 심해졌는지(유럽에서의 곤궁을 극복하기 위해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농업을 포기하고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하였다. 아프리카 역사상 처음으로 뿌리 뽑힌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도시 근처에 거대한 빈민 지구를 형성하였다.

독일에서 전쟁을 준비하면서 부여한 동기 가운데 하나는 ‘독일 식민지를 되찾자’는 희망에 불을 붙이는 것이었다. 1939년 9월 1일에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년)가 통치하는 독일이 이웃에 있는 훨씬 작은 폴란드를 기습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1936년에 이미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년)는 또다시 에티오피아를 점령하려고 시도하였다. 그것이 성공하여 이탈리아는 1943년 영국 사람들에게 쫓겨나기까지 8년 동안 에티오피아를 차지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상당 부분이 북부 아프리카에서 영국, 프랑스 그리고 나중에 미국이 합세한 연합군이 독일과 이탈리아에 맞서 치른 전쟁이기도 하다. 여기서 아프리카는 지리적으로만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아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로 식민지에 건설된 인프라 덕분에, 이제는 전보다도 훨씬 더 많은 원자재가 전쟁 수행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940년에 벨기에가 독일에 점령된 다음 런던에 본부를 둔 벨기에 망명 정부는 벨기에령 콩고에서 가져온 재원으로 수입의 86퍼센트까지를 충당하여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

서로 적이 된 유럽 ‘주인’들의 명령에 따라 다시금 수십만 아프리카 사람들이 서로에게 총질을 하였다. 그러나 유럽 사람들이 아프리카에서 짓밟고 있는 가치를 자기들의 땅에서는 수호하려고 하는 전쟁에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깨닫는 아프리카 사람들도 점점 더 많아졌다.

아프리카-병사

여기 덧붙여 새로운 세계적 강대국 둘이 나타났다. 아메리카 합중국과 소련이었다. 이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동기에서 이긴 했지만, 히틀러 독일과 맞서 싸우는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 동맹국들의 식민지 이해를 후원해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1941년에 독일 독재자 히틀러가 거의 유럽 전체를 장악하고 영국을 점령하려고 위협하고 있을 때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만나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당시 이른바 ‘대서양 협정’을 체결하였다. 전쟁이 끝난 다음 ‘새로운 세계 질서’에 대한 약속을 포함하는 문서였다. 아프리카를 위해서는 두 가지 점이 중요하였다. ‘지금까지는 억지로 (권리를) 유보했던 민족들까지’ 모든 민족이 자기 결정권을 가질 것과 미국이 세계에서 ‘원료의 원천에 동일하게 접근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약속이었다. 줄여 말하면 미국은 영국이 장기적으로 식민지를 포기하고, 미국도 아프리카의 원료를 거래하는 데 동등하게 참가한다는 약속을 받으면 히틀러 독일에 맞서 영국 편을 들어 싸우겠다는 것이다.

런던의 프랑스 망명 정부는 자기들이 배제된 것을 분하게 여기고 1944년에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970년) 장군을ㅡ뒷날 프랑스 대통령이 되는 인물-서아프리카 브라자빌로 파견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모든 프랑스 식민지의 고위 관료들에게 “식민지에서 자율 통치의 이념이나 …… 아니면 독립 정부는 먼 미래에도 배제된 일이라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독일과 그 동맹국들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난 제2차 세계 대전 마지막에 세계는 이미 이전의 세계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유럽의 언론이 거의 주목하지 않는 가운데 아프리카의 젊은 세대가 한데 모여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1912년에 이미 남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 민족회의(ANC)가 결성되었다. 이것은 뒷날 젊은 넬슨 만델라의 정치적 기반이 된다. 1919년 이후로 처음에는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의해 생명을 얻은 범아프리카주의 운동이 생겨났다. 이것은 새로운 아프리카의 자기 의식을 위해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다.

“우리는 자유롭게 되기로 결정하였다!”

1945년 10월에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제5차 범아프리카 회의에는 주로 젊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뒷날 독립한 아프리카 국가들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예를 들면 은남디 아지키웨(Nnamdi Azikiwe, 1904~1996년, 나이지리아), 케네스 카운다 (Kenneth Kaunda, 1924년~, 잠비아),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 약 1894~1978년, 케냐), 콰메 은크루마(가나), 줄리어스 니에레레(탄자니아), 아메드 세쿠 투레(기니)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우리 대표들은 평화를 믿는다. 아프리카 민족들이 수백 년 동안 폭력과 노예 제도에 희생된 이 마당에 어떻게 다른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서방 세계가 아직도 인류를 폭력으로 통치하려고 결심하고 있다면, 아프리카 사람들도 자유를 쟁취할 마지막 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런 폭력이 그들 자신과 세계를 파괴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되기로 결정하였다. 우리는 교육을 원한다. 우리는 소박한 수입의 권리를 원한다.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할 권리, 아름다움을 받아들이고 만들어나갈 권리를…… 우리는 수백 년 동안이나 참아온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우리는 더 많은 희생과 노력을 할 각오가 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굶주리면서 세계의 짐꾼 노릇을 할 각오는 이제 되어 있지 않다. 우리의 빈곤과 무지를 통해 거짓된 귀족주의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제국주의를 후원할 생각은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그리고 사회의 개선을 위해 싸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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