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사냥: 파국을 불러온 노예 매매

맨 처음 유럽으로 끌려온 아프리카 사람들은 ‘이국적인 모습’ 덕분에 호기심 어린 관찰 대상이 되었다. 한동안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영국·프랑스·독일에서도 부잣집에 ‘검둥이(니그로)’* 하인이 있다는 말은 상당히 멋진 말로 들렸다. ‘검둥이’ 하인은 원칙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졌다. 이 시기에는 아직 ‘검둥이’가 열등하다는 따위의 섬세하게 다듬어진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는 없었다. 그들은 ‘전혀 다르게 생겼고 그래서 흥미롭고 ‘호기심을 만들어내는’ 존재였다. 젊은 콩고 사람들은 포르투갈에서 대학에 다닐 수도 있었고, 예외적인 경우이지만 경력을 쌓을 수도 있었다.

1550년 무렵 포르투갈 인구의 10퍼센트 정도가 아프리카 사람이었다. 이들 모두가 하인이나 고용된 사람만은 아니었다.

* 표시를 붙인 단어는 과거의 역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런 말은 예전에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아주 분명히 보여주고, 그래서 차별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라서 오늘날 사용해서는 안 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그대로 인용하였다.

유럽 사람들이 등장하기 전에도 아프리카의 문명 대부분에 노예 제도가 있었다. 전쟁에 지면서 붙잡혀온 노예나 아랍 사람들의 노예 매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가축보다 더 고약하게 취급해도 되는 일종의 물품이기보다는 제한된 권리만 가진 가족의 일원과도 같은 존재였다. 서부 아프리카의 역사가 조제프 키-제르보(Joseph Ki-Zerbo, 1922년~)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일반적으로 노예는 재빨리 가족 안에 통합되었다. … 따라서 노예도 시민권을 가졌고 게다가 자신의 재산권을 가졌다. 해방이 되는 방식도 여럿 있었고, 이런 방식들 중 일부는 노예의 활동 덕분에 생겨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이미 존재하던 관행을 계속한 것뿐이라는 유럽 사람들의 주장은 웃기는 일이다.”

유럽 사람들이 남북 아메리카의 거대한 농장에서 목화와 담배, 사탕수수를 재배하면서 얻는 엄청난 이윤을 더욱 높이기 위해 점점 더 절실히 노동자를 필요로 하면서 사정이 갑자기 바뀌었다. 아메리카의 원주민은 노동력에서 제외되었다. 그들은 땅을 뺏겼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학살과 더불어 유럽 사람들이 가져온 질병에 감염되어 급격히 수가 줄어들고 망가져서 새로운 주인들에게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극히 짧은 시간 만에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랍 상인들로 구성된 마피아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을 멸시하는 태도를 취하며 완전히 새로운 노예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제 노예는 지위가 낮은, 또는 권리가 줄어들거나 없는 ‘인간’이 아니라 이윤을 얻기 위해 붙잡아서 수송하고 팔 수 있는 ‘상품’으로 취급되었다. 포르투갈 사람들의 독점 사업이 다른 유럽 사람들의 공격을 받았고, 이제 서부 아프리카 앞바다에서는 해적선들 말고도 스페인,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그리고 한동안은 스웨덴, 덴마크, 독일 국적의 함대들이 서로 이 사업을 두고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노예-상인들

스페인 사람들이 한동안 자기들의 체계를 관철시켰다. 그에 따라 그들이 노예 반입을 통제하면서 반입의 권리를 다른 나라나 다른 상인에게 팔았다. 노예는 개인으로 기록되지 않고 톤 단위로 제시되었다. 1518년에 처음으로 반입 허가(‘아시엔토)가 나왔다. 1696년의 문서를 보면 포르투갈의 ‘기니 회사’에 연간 ‘검둥이 1만 톤의 반입을 허가해주고 있다.

오늘날 서부 아프리카 해안을 방문하는 사람은, 당시 유럽 사람들이 아프리카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사업을 놓고 자기들끼리 벌이는 싸움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대포로 무장한 요새들과 궁성들을 지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것들은 해안선을 따라 촘촘히 늘어선 말 없는 노예 시대의 증언이다. 수천만 명의 아프리카 어린이와 남녀 어른들이 바다 너머로 실려가기 전에 이 요새로 붙잡혀와서 여기서 마지막으로 아프리카 대륙을 바라보았다. 줄잡아 적어도 2,000만 명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아마도 5,000만 명이 더 옳을 것이다-아주 비참한 상황에서 노예로 끌려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 사냥 도중에, 또는 여러 주나 걸리는 항해 도중에 죽어서 바다에 던져졌는지는 아마도 영원히 통계를 낼 수 없을 것이다.

노예를 실은 선박에는 30명의 선원과 다섯 명의 장교로 구성된 승무원이 많게는 500명까지의 노예들을 극도로 열악한 조건에서, 적어도 5주에서 3개월 동안 수송하였다. 적지 않은 포로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탈출을 시도하였으며, 탈출할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계속 고통을 당하느니 차라리 바다로 뛰어드는 쪽을 택했다. 다른 어떤 가능성도 없는 사람들은 음식을 거부하여 죽으려고 하였다.

어떤 영국의 노예 수송선 선장은 노예들이 음식을 거부하는 것은, “입술을 꼭 다물고 거부하는 노예의 입을 벌겋게 달군 석탄으로 억지로 벌려서 급속 깔때기를 목구멍에 쑤셔박아 억지로 음식물을 투입” 해도 되는 범죄 행위라고 보고하였다. 당시의 선박 의사는 밤에 출발하라고 권고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다음 날이 되어서야 고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러면 특히 여인네들의 울부짖음과 히스테릭한 외침이 다른 하물(=노예)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다.”

노예들이 바다 한가운데서 폭동을 일으키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보통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살해되고, 주동자는 가장 고약한 고문을 받은 다음 바다에 던져졌다. 당시 어떤 선장은 이렇게 보고한다. 폭동이 일어났고, “나의 하물 중에서 폭동을 일으킨 검둥이 80명을 즉시 사살하거나 물에 빠뜨려 죽여야만 했다. 그보다 더 나쁜 것은 나머지 하물 대부분이 이 짧은 전투 중에 심각한 총상을 입어 상처가 붓고 곪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치료를 거부하고, 심지어는 아문 상처를 새로 벌려서 피를 흘린 끝에, 아니면 감염되어서 죽어버리거나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들이 되어버렸다.”고 아쉬워하였다.

폭동이 성공한 사례는 단 하나가 알려져 있다. 미국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1947년~)는 이 실화를 바탕으로 <아미스타드〉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1839년 ‘아미스타드 호에서 일어난 노예들의 폭동

“1839년 초에 멘데족 출신의 스물다섯 살 난 셈베 피(Sengbe Pieh)는 서부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 붙잡혀 포르투갈 노예 수송선에 실려서 쿠바로 운송되었다. 쿠바에서 그는 시에라리온에서 붙잡혀 온 다른 53명의 남녀와 함께 두 명의 스페인 사람에게 노예로 팔렸다. 스페인 사람들은 노예 수송 선박 ‘아미스타드’ (스페인어로 ‘우정’) 호와 라몬 페레르 선장이 이끄는 승무원들을 고용하여 이 노예들을 대농장으로 데려가려고 하였다.

출항 직후 셈베 피는 밤중에 자신의 쇠사슬을 끊고 다른 사람들의 쇠사슬도 풀어주었다. 그들은 맨 먼저 잠자고 있던 승무원들에게 기어가 무기를 빼앗은 다음 페레르 선장을 붙잡아 그와 또 다른 한 사람을 죽였다. 셈베 피가 지휘권을 넘겨받았고, 승무원들은 그의 지시를 따라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스페인 사람인 페드로 몬테스와 호세 루이즈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속여서 ‘아미스타드’ 호를 동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몰았다. 60일이 지난 다음 그들은 서부 아프리카가 아닌 뉴욕 근처 롱아일랜드 해안에 도착하였다. 스페인 사람들은 해군의 도움을 받아 지치고 혼란에 빠진 아프리카 사람들을 다시 붙잡을 수 있었다. 그들은 폭동과 살인죄로 기소되었다. 두 스페인 사람은 자신들의 ‘노예 소유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였고, 이 요구를 스페인 여왕이 후원하였다.

이 시기에 뉴욕 주와 다른 몇몇 북부 주들에서는 노예 제도가 이미 금지되어 있었다. 미국 전체로는 1863년에 공식적으로 노예 제도가 금지되었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노예 제도의 폐지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노예 제도 폐지론자들은 여론을 동원하여 아프리카 사람들을 후원하였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멘데어 통역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들 폐지론자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다른 모든 자유로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자유를 옹호할 권리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석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심문은 여러 달이나 계속되었고 마지막에는 최고 법정까지 올라갔다. 전체 여론은 점점 더 둘로 나뉘었다. 아미스타드 호 사건은 노예 제도의 찬성과 반대를 놓고 벌어진 일종의 공개 재판이 되었다.

셍베 피가 멘데어로 열정적인 연설을 하였고 그것이 통역되면서 재판에 중요한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이 젊은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아프리카 출신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자유롭게 태어났다. 우리는 태어난 이후로 자유로웠고 또한 자유로울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게 남아야 하고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을 변호하는 사람들이 이 변론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노예 폐지론자들은 마침내 미국의 전직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John Quincy Adams, 1767~1848년)를 이 사건의 변호인으로 받아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일혼세 살의 나이에 병들고 절반쯤 눈이 먼 그는 여덟 시간 이상 걸리는 연설을 하였고, 그것이 마침내 옛날 노예들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그들에게 시에라리온으로 돌아갈 뱃삯이 지불되었다. 1842년 초에 53명의 사람들 중에서 35명만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들 중에는 셈베 피도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아메리카로 오는 항해 도중에, 그리고 오랫동안 계속된 심문 도중에 죽었다.”

영국에서 노예 제도는 1833년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승리를 거둠으로써 1863년에야 비로소 전국적으로 폐지되었다. 많은 나라들에서는 20세기에 와서야 노예 제도의 폐지가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1963년에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오늘날에도 노예 제도가 있다. 특히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그리고 동유럽에서도 어린이 노예의 사례가 계속 나타난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궁지에 몰린 가난한 부모들이 거짓 약속을 믿고 그들을 팔아넘기는 바람에 어린이 노동이나 매춘에 이용당하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건강하고 가장 힘이 좋은 사람들을 수백 년에 걸쳐 수천만 명 이상 도둑맞은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규모로 경제적 · 인간적 비극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지급까지 한 번도 문책을 받은 적이 없다. 다른 어떤 대륙에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끌려가지는 않았다. 아프리카 노예의 자식들과 손자들은 고향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자라났다. 미국과 브라질 말고도 아루바, 보네르, 쿠라사오, 그레나다, 자메이카, 아이티, 푸에르토리코, 트리니다드, 쿠바, 도미니카 공화국, 벨리즈, 니카라과, 파나마, 베네수엘라, 콜럼비아, 에콰도르, 페루, 수리남, 가이아나 등지에서.

아프리카 대륙 바깥에서 살고 있는 아프리카 혈통의 사람들과 아프리카 사람들은 오늘날 세계 모든 곳에 있다.

수천만 명의 인간을 도둑질한 이 범죄는 막을 수도 있었던 것인가? 아프리카 민족이나 나라들 중에서 유럽의 착취자들에 맞서 성공적으로 방어를 한 경우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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