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고 정리 바겐세일: 베를린의 콩고 회의

유럽 사람들이 처음에 아무것도 모르고 아프리카 해안에 들어와서 그곳에 자리를 잡으려고 할 때와는 달리 1880년 무렵에는 이미 ‘검은 대륙의 내부에 대해 상당히 정확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그 즈음 독일 사람 하인리히 바르트(Heinrich Barth, 1821~1865년)와 스코틀랜드 사람 데이비드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 1813~1873년) 그리고 영국 사람 헨리 모턴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 1841~1904년) 등과 같은 이른바 탐험 여행가들이 대륙 내부로 들어갔다.

하인리히 바르트와 데이비드 리빙스턴만 해도 기독교 휴머니즘을 지니고 있었고, 그래서 리빙스턴은 노예 제도를 상당히 날카롭게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헨리 모턴 스탠리는 전혀 다른 동기로 여행을 하였다. 유럽 국가가 국제적인 힘의 정책을 취해야만 비로소 정말로 강력해진다는 생각은 비교적 최근의 것이었다. 여기서 제국주의 이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제국이란 민족적 경계에 제한을 받지 않는 왕국이다. 영국 사람들은 ‘대영 제국’이라는 말을 일찌감치 이런 뜻으로 이해하였으며, 자랑스럽게 가슴을 쭉 펴고 이 말을 했다.

처음에 영국과 프랑스에게 ‘발견’과 아프리카 대륙을 ‘압류하고자 하는 욕망에 엔진을 달아준 것은 바로 이들 사이의 제국주의 경쟁이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북부 아프리카의 아랍어와 동부 아프리카의 스와힐리어를 빼고는 영어와 프랑스어가 아프리카 대부분의 지역에서 통용되는 식민지 언어이다.

이것은 서방의 무지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아프리카 사람들 사이에서 예나 지급이나 어미말로서 대단한 중요성을 가진 아프리카 언어들에는 불리한 요소로 작용한다.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같은 다른 유럽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늦게야 아프리카 대륙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맡았다. 가장 먼저 온 사람들, 즉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람들은 대부분 처음부터 자리 잡았던 해안 지대에 머물렀다. 남아프리카의 네덜란드 사람들만이 예외였다. 그들은 모국과의 결속을 끊어버리고 스스로 아프리카 대륙에서 ‘신에게서 넘겨받은 권리’를 가진 흰둥이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여겼다.

새로운 제국주의자들의 연대기는 처음에는 마치 토끼와 고슴도치 사이의 경쟁처럼 읽힌다. 그것은 아무런 개념도 없고, 또한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해 완전히 무지한 상태에서 벌인 경쟁이었다. 프랑스가 1881년에 튀니지를 점령하자, 영국은 1년 뒤에 이집트를 집어삼켰다.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줄루족과 다른 ‘반란군들’을 제압하느라 머뭇거리는 동안, 프랑스 장교들은 세네갈과 서부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들을 뚫었다. 독일은 마지막에 황제의 비호 아래 브레멘의 담배상인 아돌프 뤼데리츠(Adolf Luderitz)가 ‘독일령 서아프리카 (오늘날 나미비아)를, 카를 페터스(Carl Peters)가 ‘독일령 동아프리카’(오늘날 탄자니아)를, 구스타프 나흐티갈(Gustav Nachtigal)이 서부 아프리카에 있는 토고와 카메룬을 차지하였다.

벨기에 왕 레오폴 2세(1835~1909년)는 ‘작은 옥좌에 앉은 큰손 투기꾼’으로서 헨리 모턴 스탠리를 후원한 일을 통해 콩고에 들어가서 벨기에령 콩고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가 1876년에 선언한 말처럼 ‘마침내 중앙 아프리카 땅덩어리에 문병의 깃발을 꽂기 위해서’ 였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다른 어떤 식민지도 ‘벨기에령 콩고처럼 무자비하게 유럽 군주의 개인적인 금고를 위해 약탈당한 곳은 없었다. 그냥 감독자 눈에 너무 일이 느리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들과 여자들과 남자들이 손이 잘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두들겨 맞아서 죽었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콩고에서 벨기에의 강압 통치가 이루어지는 동안 약 1,000만 명의 아프리카 사람들이 폭행으로 죽음에 이르렀다고 추정한다.

혼란이 점점 더 커지자 독일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마침내 ‘질서’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그는 1884년 11월 15일에 유럽 13개 국가 대표들을(여기에 덧붙여서 미국과 오스만 제국의 대표들도 있었지만, 아프리카 국가의 대표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베를린의 ‘콩고 회의’에 소집하였다. 이것은 콩고 강하구에 대한 포르투갈의 요구와 벨기에 왕의 콩고 분지에 대한 식민 정책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하여 유럽 열강들 사이에서 아프리카 대륙을 완전히 나누어 갖는 계획으로 끝을 맺었다.

1885년에 나온 ‘베를린 협약 문서’ 전문(前文)에 따르면 서명한 국가들은 모두 “원주민들의 관습적·물질적 안녕을 증진하기 위한 방법을 고려하기”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앞으로 자기들끼리의 갈등을 피하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약속대로 식민지의 약탈을 계속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어떤 대륙에도 아프리카처럼 수천 킬로미터 이상이나 직선으로 곧게 뻗은 국경선은 드물다. 이것은 지리적인 또는 종족적인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멋대로 갈라놓은 선이다. 베를린 회의에서 약속된 것은 그후 20년 동안 극히 비인간적인 폭력을 동원하여 실행에 옮겨졌다. 협약 문서 35조에는 모든 서명국가가 각기 점령한 나라에서 “취득한 권리를 …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관공서를 확보할 의무가 있었다.

단 하나의 아프리카 국가만이 유럽 사람들을 물리치고 그 이후로 40년 동안 그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에티오피아의 황제 메넬리크 2세(Menelik II, 1844~1913년)는 1896년에 이탈리아군에게 승리를 거두어 이탈리아 사람들을 변방 지역인 에리트레아와 소말리아 일부에만 머무르도록 붙잡아두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아프리카의 식민지 지도는 에티오피아와 작은 라이베리아(미국이 1822년부터 해방 노예들을 보낸 곳)만이 유럽 국가들의 분할의 바다에서 마지막까지 독립적으로 남은 섬들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아프리카는 ‘식민 지배 지역이 되었다.

상대적으로 얼마 안 되는 유럽 사람들이 거의 1억 2,000만 명에 이르는 인구를 가진 대륙 전체를 폭력으로 장악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노예 매매 시절에는 아랍과 아프리카와 유럽의 상인들 사이에 아주 분명한 공조 체제가 있었고 수많은 아프리카 지도자들도 잔혹한 이익을 함께 취했던 반면에, 이제는 이런 협동 작업이 거의 필요 없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제국주의에서는 오로지 잃어버릴 것밖에 없었음이 아주 분명했다. 거대한 지역에 말뚝을 박고 그것을 확보하던 초기 단계에는 특히 그랬다.

이 과정에서 유럽 사람들은 1500년 무렵에는 갖지 못했던 두 가지 이점을 확보했다. 1850년부터 의약품 키니네가 나와서 마침내 말라리아를 예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사망자 수를 80퍼센트나 감소시켰고, 이어서 열대 지방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밖에도 새로운 무기들이 (예를 들면 1884년 이후에 나타난 기관총 같은) 개발되었다. 이런 무기들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팔지 않기로 1890년 브뤼셀에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합의를 보았다. 기관총은 초당 11발을 쏠 수가 있었다. 수단의 영국인 장교들은 단 한 번의 전투로 1만 800명의 아프리카 적군을 죽였는데, ‘아군의 손실은 49명뿐이었다고 열광에 넘쳐 보고하고 있다.

아프리카 모든 지역의 추장들과 왕들, 정치가들은 그사이에 유럽어들을 이해하게 되었고(그 반대는 오직 예외일 뿐이었고 오늘날도 그렇다) 백인들과의 이상한 경험을 많이 축적하였기에, 이번에는 그들이 유럽 사람들에 맞서 항의를 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대부분의 역사책에는 지급도 등장하지 않지만) 막강한 유럽 세력에 맞선 저항의 문서들에서 수많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예의 바른 말투를 유지하는 것을 보면 매우 인상적이다. 그에 반해 유럽 사람들은 자주 ‘야만인들에 대한 경멸감에서 오히려 원시적이고 평범한 말투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1914년-이전-유럽이-지배한-아프리카-식민지

유럽의 식민 정책 (1890~1895년)에 맞선 아프리카 추장들의 항의문서: “떠나시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마시오!”

1890년에 동아프리카 야오(Yao)족의 지도자 술탄 마켐바(Sultan Machemba)는 독일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의 말을 들었지만 내가 어째서 그 말에 복종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소. 차라리 죽는 편이 났겠소. 당신의 발치에 몸을 던지지는 않을 테요. 당신도 나처럼 신의 피조물이니 말이오. 나는 이곳 내 나라의 술탄이고, 당신은 당신 나라의 술탄이오. 나는 당신더러 내 말에 복종하라고 말하지 않았소. 당신이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오. 그것은 나한테도 해당되오. 나는 당신에게로 가지 않겠소…”

1891년에 가나의 아샨티 민족의 왕 프렘프 1세(Premph L.)가 영국 사람들에게 한 말:

“아샨티가 오늘날 사는 방식대로 여왕 폐하의 보호를 받음을 기뻐하라는 제안은 매우 진지한 고려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샨티 왕국이 절대로 그와 같은 정책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정에 도달했음을 당신에게 말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우리 아샨티가 모든 백인에게 친절한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살았던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1895년에 모잠비크의 바루에(Barue)족의 추장 마콤베 항가(Macombe Hanga)는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이렇게 알렸다:

“백인들이 점점 더 많이 아프리카로 밀려 들어오고 내 나라 모든 지역에서 사업가들이 활동하고 있음을 봅니다. 내 나라는 시대의 개혁을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나도 당신들을 향해 개방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훌륭한 도로와 철도를 갖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하지만 나는 내 조상들과 똑같은 마콤베로 남을 것입니다.”

1895년에 서아프리카 모시(오늘날의 부르키나파소)의 왕 워보고(Wobogo)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백인들이 내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나를 죽이고 싶어한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들은 내 나라를 더 잘 조직하도록 도움을 주려는 것뿐이라고 말하지요. 하지만 나는 이 나라가 현재 그대로 훌륭한 질서를 갖추고 있다고 여깁니다. 나는 우리에게 무엇이 좋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압니다. 나는 스스로 무역을 하고 싶소. 그 밖에도 내가 당신들의 목을 자르라고 명령하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시오. 마침내 이곳을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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