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현대: 여성이 목소리를 높이다

옛날 아프리카에서 ‘역사를 만든 여성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많은 것이 그저 전설일 뿐이다. 전혀 기록도 없고 역사적인 여성들 자신의 진술도 거의 없다시피 하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네페르티티(Nefertiti, 기원전 14세기)와 클레오파트라(Cleopatra, 기원전 69~30년) 같은 여성들이 등장한다. 누비아에서는 티이(Tiy, 기원전 1415~1340년)가 통치에 참가하였다. 1,000년 뒤에 서부 아프리카의 여왕 둘이 식민지 세력에 맞서 싸웠다. 앙골라에서 은징가(Nzinga, 1582~1663년) 여왕이 포르투갈 사람들에 맞서 싸웠고, 아샨티의 야 아산테와(Yaa Asantewaa) 여왕이 영국 사람들에 맞서 싸웠다.

이런 것은 절대로 아프리카만의 특성이 아니다. 다른 모든 대륙에서도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만, 모든 시대에 분명히 존재했던 역사적으로 중요한 여성들의 삶의 이야기가 기록되었다. 여성의 해방과 자기 결정권, 독자적인 표현 형식의 권리는 대부분의 문화에서 아주 늦게야 그리고 대개는 여성들 자신의 투쟁을 통해 얻은 것이다. 아프리카와 유럽의 여권론자들의 토론에서 아프리카 여성들이 전통에 대한 자기들의 관계를 더욱 섬세하게 표현한다는 것이 눈에 띈다. 드물지 않게 그들은 그런 전통의 부정적인 부분을 비판하지 않은 채 좋은 전통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런 대화에서 소녀들에 대한 육체적인 학대(‘할례’)를 옹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할례란 질을 꿰매 붙이거나 클리토리스(음핵)를 제거하는 시술로, 흔히 ‘그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주장된다. 이것은 주로 소말리아와 수단에서 행해지는 광신적인 전통으로, 오늘날까지도 그곳에서는 90퍼센트 이상의 여성이 ‘할례’를 받는다. 세계보건기구(WHO)의 보고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약 1억 명의 여성이 이런 시술을 받았는데, 그 중 대부분인 약 8,000만 명이 아프리카 여성들이었다. 1984년에 이미 아프리카 여성 기구들이 세네갈에 ‘아프리카 내부 위원회’를 만들었고, 그것은 뒷날 ‘아프리카 통합 기구'(OAU) 산하 상설 기구가 되어 오늘날 다양한 유엔 기구들과 함께 여성의 보호를 위해 앞장서고 있다.

그에 반해 남아프리카의 흑인 주민 대다수가 행하는 관습으로, 장래 신랑이 신부의 가족에게 치르는 로볼라(lobola)라는 신부의 몸값은 이슬람 색채가 강한 북부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차도르를 쓰는 것만큼이나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일을 당하는 여성 자신도 그것에 찬성할 경우 그에 대한 훌륭한 이유를, 또 반대하는 경우에도 역시 그에 대한 훌륭한 이유를 내놓는다. 해방이란 단 한 번만의 행동이 아니다. 그와 같은 논의는 지속적인 운동과 비판적인 검토, 공개적인 발전의 표현이다.

식민 지배가 끝난 이후로 자의식을 가진 아프리카 여성들을 막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많은 유럽 사람들의 머릿속에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아프리카 여성에 대한 판에 박힌 굴욕적인 모습을 정당하게 거부한다. 그 모습이란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사람의 눈에 에로틱하고 소박한 태도로 큼직한 젖가슴을 드러낸 절반쯤 벗은 젊은 여인의 모습이거나, 아니면 길게 늘어진 젖가슴에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아이가 매달려 젖을 빨고 있는 허약한 어머니의 모습이다.

사라 ‘사르트예’ 바트만

2002년에 남아프리카에서 특별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그 장례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100년 이상이나 자신들의 권리를 박탈당했던 역사의 핵심을 보여준 것이고, 또 꼭 필요한 존경심을 보여준 의식이기도 했다.

1789년에 남아프리카의 이스턴케이프에서 태어나 1815년 파리에서 죽은 사라 ‘사르트예’ 바트만이 2002년 8월 9일 여성의 날에 남아프리카에 묻히다:

“사라 바트만(Sarah ‘Sartjie Bartmann), 뒤에는 단순히 ‘사르트예’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여성의 진짜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는 1789년에 남부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 공동체의 하나인 코이코이족의 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유럽 사람들은 이들 코이코이족을 경멸하는 뜻으로 ‘호텐토트’라 불렀다. 어린 시절이나 청소년 시절에 그녀는 세례를 받고 이런 기독교 이름을 얻었으며, 한 영국인 선박 의사가 그녀가 스물한 살 때 이런 이름으로 케이프타운에서 그녀를 매입하였다. 그는 1810년에 그녀를 런던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특별히 튀어나온 엉덩이 때문에 영국의 여러 도시에서 연시(年市)가 열릴 때마다 벌거벗겨져서 ‘호텐토트-비너스’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전시되었다. 이 굴욕적인 구경거리는 점점 더 유명해졌다. 그녀가 우리에 갇혀 앉아 있는 모습으로 런던의 피카딜리에서 전시되었을 때 마침내 노예 제도 반대자들의 항의가 일어났다. 의사는 1815년에 그녀를 프랑스의 동물상인에게 팔아버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이 동물 상인은 이번에는 파리에서 똑같은 구경거리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프랑스에 도착한 지 겨우 몇 달 만에 죽었다. 그때 그녀는 스물다섯 살이었고 아마도 성병 때문에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고난의 길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죽은 지 스물네 시간 만에 당시 대표적인 해부 전문가 조르주 퀴비에 남작에게 넘겨졌다. 그는 시신을 조사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성 기관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시신을 해부했다. 그의 조사 목적은 사라 바트만이 인간이냐 아니면 동물이냐 하는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16쪽에 이르는 보고서에서 그는 그녀가 인간에 속한다는 결론을 밝혔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시신을 밀랍으로 채워서 두뇌와 두개골과 음순(陰脣)만 빼고-전시용으로 만들어 파리의 ‘인간 박물관’에 기증하였고, 그것은 1974년까지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남아프리카 정부가 들어서고 1년이 지난 1995년에 코이코이족과 산족의 소원에 따라, 남아프리카 정부는 사라의 시신의 나머지 부분을 아프리카 고향에 묻기 위해서 프랑스 정부와 협상을 시작하였다. 프랑스의 의회에까지 상정되었던 이 협상은 6년이나 걸려서 마침내 시신을 내주기로 공식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8,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국제적인 통신사들이 보도하는 가운데, 기품 있는 기념식을 치르고 사라 사르트예’ 바트만은 2002년 8월 9일에 남아프리카 이스트케이프 근처의 작은 도시 한키에 묻혔다. 그녀의 무덤은 국립 기념 장소로 지정되었다.”

미리암 마케바

1932년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에서 태어난 미리암 마케바는 ‘마마 아프리카’라고도 불린다

미리암-마케바

“다행히도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또 다른 남아프리카 여성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 미리암 마케바(Miriam Makeba)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를 단순히 ‘마마 아프리카’라 부른다. 1950년대 중반에 그녀의 목소리는 ‘맨해튼 브라더스’에 의해 발견되어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바로 뒤이어 당시 스물다섯 살의 그녀는 솔로 가수로의 경력을 시작하여 자신이 직접 여성 트리오를 만들었다. 1959년에 그녀는 미국에서 뮤지컬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이미 소수 백인 정권의 흑백 분리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여왔던 그녀는 미국에서 차별적인 ‘인종법’에 반대하는 발언을 하였지만 대중적인 인기를 잃지는 않았다. 남아프리카 정부만은 곧바로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는 분노’라고 느꼈다. 1960년에 그녀는 남아프리카로 돌아오는 것이 거부되었으며, 그 조치는 1990년에 흑백 차별 정책이 끝날 때까지 3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녀는 여러 해 동안이나 미국에 살다가 나중에는 정치적 불만이 점점 커지자 서부 아프리카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서부 아프리카 기니 대표로 뉴욕의 유엔 총회에서 두 번이나 남아프리카의 흑백 차별 정책의 부담함에 대해 연설하였다. 인권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을 아프리카 음악과 결합시켰기 때문에 그녀는 국제적인 연주 여행을 할 때면 유명한 정치가들과 만나는 일이 많았다. 예를 들면 당시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나 쿠바 원수 피델 카스트로 같은 사람들이다. 1990년에 그녀가 남아프리카로 돌아올 때는 넬슨 만델라가 손수 마중을 나왔다. 이제 일흔 살이 넘은 그녀는 아직도 국제적인 연주 여행을 계속하고 있고, 옛날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관심이 높다. 오늘날에는 남아프리카에 민주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주요 관심사이다. 2001년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실업 문제와 에이즈에 맞서 행동을 해야 한다.”

아프리카의 많은 풍요 신화들에서 여성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역할뿐만 아니라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역할을 맡는다. 그들은 영적인 힘을 지닌, 숭배를 받는 여신으로 나타난다. 남성 신을 믿는 유대교 기독교·이슬람교 같은 전통적인 유일신 종교들에서는 꿈도 꾸기 어려운 역할이다. 일부 반투 종교에는 여러 변이 형태를 가진 이름 중에 ‘위대한 어머니’ 또는 ‘창조의 여신’을 뜻하는 니나반후-마(Ninavanhu—Ma)도 있다.

초기 아프리카 사회의 다양한 종족들에게서 나타나는 성적인 역할 분담에 대한 비판적 연구는, 그와 같은 신화가 영적인 차원에서뿐 아니라 아프리카의 넓은 지역에서 아주 분명한 사실에 근거한 것임을 알려준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읽어야만 그 점을 알 수 있다.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민족학자 집단이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면서 상투적 유형을 강화하는 방식, 즉 사냥꾼인 남자가 적대적인 영역으로 나가는 반면, 여성은 수동적으로 집에 머물러 아이들과 집안일과 채소밭을 보살핀다는 유형으로 이끄는 경향이 얼마나 강한지는 비판적으로 읽어야만 알 ·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1966년에 시카고에서 하버드 대학교가 주관하는 민족학자들의 학회가 ‘사냥꾼 남성’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참석자들의 90퍼센트가 남자였다. 그들은 최근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그 핵심은 ‘오늘날 우리의 지성과 감정적·사회적 능력은 사냥꾼인 남자가 인류의 역사에 가져온 특성에 근거하여 계속 발전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다음과 같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정말로 사냥을 나가서 자주 여러 날 동안이나 집을 멀리 떠나 있었다. 이 학회를 조직한 두 사람 중 하나인 리처드 리 교수는 다른 초기 공동체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특성을 남부 아프리카 산족의 한 무리에게서 찾아내어 발표하였다. 남자들이 사냥을 나갔다가 다섯 번 중 네 번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에 비해 여자들은 매일같이 먹을 것을 채집하러 나가서 언제나 무엇인가를 가지고 돌아왔다. 전체적으로 보아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평균 2.5배의 먹을 것을 가져왔다. 이런 연구 결과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얼마 뒤 출간된 학회 보고서는 ‘사냥꾼 남성’이라는 제목을 굳건히 지켰다.

마셸

이와 같은 역사적인 무지에 맞서 여성들이 마침내 자신들의 말을 듣게 하고 자신들의 관점을 내놓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만 했는지, 동남 아프리카 모잠비크에서 교육부 장관을 지낸 여성 그라사 마셸(Graça Machel)의 개인적인 추억이 생생하게 보여준다.

“내가 어린 시절에 경험한 것은 오늘날까지도 수백만의 여성들이 되풀이하여 경험하는 것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수백만, 수천만 번이나 되풀이되는 일이다.”

1945년 모잠비크에서 태어난 그라사 마셸은 2002년에 자신의 삶을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지금도 나는 아버지가 죽고 20일 만에 내가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하려면 마음이 슬퍼진다. 아버지는 남아프리카 광산에서 일하는 계약직 노동자였다. 어머니는 남의 집에 고용살이를 해서 가져오는 얼마 안 되는 돈으로 우리 아이들을 보살폈다. 나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읽고 쓸 줄을 몰랐다……

여섯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교사로 일하던 큰언니에게 맡겨졌다. 이것은 제때에 학교에 다닐 유일한 방법이었다. 큰언니는 내게 어머니가 되어준 것이다. 언니는 좋은 어머니이자 좋은 조언자이기도 했다. 어머니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내게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또한 지식과 교육 쪽으로 내 눈을 열어주었다. 언니는 어린 동생들을 자기 자식처럼 받아들여 보살펴주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수많은 여성들 중 하나였다…… 그라사 마셸은 감리교회의 장학금을 받아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자기 학년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이었던 그녀는 미국인 여자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리스본에서 대학에 다닐 장학금을 받았다. 스물세 살인 1968년에 리스본에서 외국어를 전공하기 시작하여 마지막 학기에는 4개 언어를 유창하게 말하게 되었다.

‘내 삶에서 이 세 여성이 없었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을 배우지 못하고 오늘날의 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와 큰언니 그리고 내가 대학 공부를 하도록 도와준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미국인 여자 선교사가 바로 그들이다. 옛날에 나와 함께 학교에 다닌 많은 동창생들은 지금 살아 있지 않다. 피할 수도 있는 질병에 걸려 죽거나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주 힘든 삶을 살았기에 아직 50대의 나이에 일흔 살처럼 보인다. 삶의 고단함에 지친 탓으로…… 포르투갈의 학교에서 나는 유일한 흑인 여학생이었는데, 그곳에 완전히 소속될 수 없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뒷날 모잠비크로 돌아와서 나는 아주 가까이서 점점 더 많이 내 민족의 굴욕을 체험하였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고 느꼈다……스물여덟 살 때 그라사 마셸은 당시 포르투갈 병사들의 잔인한 추적을 받고 있던 저항 세력으로 사모라 마셸(Samora Machel, 1933~1986년)이 이끄는 ‘모잠비크 자유 전선(FRELIMO)’에 가입하였다. 포르투갈 비밀경찰이 자신의 흔적을 찾아내자 그녀는 탄자니아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군사 훈련을 받은 그녀는 다시 모잠비크의 프렐리모와 연결되었다. 그리고 모잠비크로 돌아와 프렐리모 학교에서 난민 어린이들을 가르치라는 부름을 받았다. 여기서 그녀는 사모라 마셸을 만났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우리는 천천히 가까워졌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사모라 마셸의 첫 부인 조시나도 저항 운동에 동참하고 있었지만 2년 전에 죽으면서 그에게 여섯 아이들을 남겼다.

1974년에 포르투갈에서 마침내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그로써 식민 지배의 종식을 위한 길이 활짝 열렸을 때 그라사 마셸은 스물아홉 살이었다. 그녀는 독립된 모잠비크의 초대 교육부 장관을 맡으라는 제안을 받았다. 오늘날 그녀는 이렇게 기억한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런 도전에 깜짝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교육은 프렐리모의 핵심적인 과제 중 하나였으며, 나는 첫 정권의 유일한 여성 장관이 될 것이기 때문에 모잠비크의 모든 여성을 대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침대로 기어 들어가 며칠 동안 울었다. 만일 내가 실패하게 되면 모든 사람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자에게 책임을 맡기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그래서 나는 거절하였다. 하지만 사모라는 당연히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었겠나? 나는 눈물을 닦고 일하러 갔다.’ 1975년에 사모라 마셸은 모잠비크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몇 달 뒤에 사모라와 그라사는 결혼하였다. 그녀는 그의 첫 번째 결혼에서 생겨난 여섯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었고, 나중에 자기 자신의 아이들도 얻었다.

1976년부터는 주로 인종 차별 정책을 쓰던 남아프리카의 재정적 지원을 받는 지하 조직 ‘모잠비크 국민 저항(RENAMO)’이 새로 출범한 정권에 맞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것은 다음 여러 해 동안 약 10만 명의 일반인을 희생시킨 공격이었다.

그라사 마셸은 교육부 장관으로서 내란으로 흔들린 모잠비크의 어린이들에게 가능한 한 최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을 자신의 개인적인 과제로 삼았다. 1975년부터 1989년까지 그녀가 장관으로 있는 동안에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의 숫자가 40퍼센트에서 80퍼센트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녀는 모잠비크의 유네스코 위원회 의장이 된 후에는 전쟁고아가 된 수천 명 어린이들의 운명에 마음을 썼다.

1986년 10월에 온 나라가 충격에 휩싸였다. 남아프리카 상공에서 비행기 사고가 일어나 대통령인 사모라 마셸이 죽었다. 이 사고에 대해 당시 흑백 분리 정책을 취하고 있던 남아프리카 정부가 어디까지 책임이 있느냐는 오늘날까지도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대통령 말고도 잠비아 대사와 짐바브웨 대사 그리고 다른 승객 32명이 이 사고로 죽었다. 그라사 마셸은 개인적인 슬픔에도 불구하고 1989년까지 교육부 장관을 계속하였다. 비행기 사고가 있은 다음 레나모 테러리스트들은 더욱더 강력하게 움직이면서 점점 더 많은 학교와 병원들을 테러의 목표로 삼았다.

그라사 마셸은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어린이와 여성들의 권리를 위해 국제적인 활동에 헌신하였다. 1994년에 그녀는 당시 이집트 출신 유엔 총재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Boutros Boutros-Ghali, 1922년~)의 위임을 받아 독립적인 전문가로서 ‘무력 충돌이 어린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유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1994년에서 1996년까지의 기간에 그녀는 전쟁 상황에 노출된 나라들의 현장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그녀의 보고서는 오늘날까지 유엔 역사에서 유일한 문서이고, 전쟁과 내란을 겪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특별 위원회를 설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의 보고서의 내용은 이러하다. 지난 세기 초기에는 민간인 희생자가 10퍼센트이고 희생자의 90퍼센트는 병사들이었다. 오늘날에는 사정이 뒤집어졌다. 희생자의 90퍼센트가 민간인이고 10퍼센트가 군인이다. 이 말은 마을과 거리와 학교에 있는 보통 사람들을 향해 전쟁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 어쩌면 당신도 지구상의 모든 난민의 절반이 어린이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내가 방문한 수많은 나라들에서 본 것에 따르면 부당함 때문에 고통 받는 모든 개인을 위하여 정의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완전히 비현실적인 일이다. 그러기에는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느낄 수 있도록 정의감이 살아 있는 생활 태도를 발전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 그러니까 문제는 사람들이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의 건설에 동참한다는 느낌을 갖는 살아 있는 체제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다.’

뒷날 남아프리카에서 자유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가 1990년 감옥에서 석방된 직후 모잠비크를 방문했을 때 그녀는 그를 처음으로 만났다. 2년 뒤에 그라사 마셸이 케이프타운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을 때도 그들은 다시 만났다. 넬슨 만델라의 부인 위니 만델라(Winnie Madikizela—Mandela, 1936년~)는 그가 감옥에 있는 오랜 세월 동안 그의 곁에 남아 있었지만, 그 다음에는 젊은 추종자들을 멋대로 이용하고 여러 가지 부패 행위를 저질렀다. 넬슨 만델라는 그녀와 이혼하였다. 그리고 그라사 마셸과 1998년 7월 80회 생일에 결혼하였다. 그라사 마셸은 어린이들을 위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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