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루족과 영국 – 짧은 승리

노예 제도의 종말은 아프리카에서 쟁취된 것이 아니라, 영국과 미국의 노예 제도 폐지론자와 도망친 노예를 종교적인 입장에서 도와준 퀘이커 교도, 그리고 해외에서 궐기한 노예들에 의해 쟁취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와 ‘산업 혁명’을 통해 먼저 유럽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전 세계적으로 노예제도가 의미를 잃었다. 노예 매매 사업이 그다지 큰 이익을 남기지 않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는 일정한 액수의 돈(자본)이 마지막에 이익(이윤)을 만들어내도록 투자되는 것이다. 생산품이나 노동자는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줄어들었다. 생산, 판매, 이익의 투자,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판매라는 나선형 방식이 나타난 것이다. 여기서는 원료(생산을 위한)와 시장(판매를 위한)을 통제하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 나머지 모든 것은 여기에 종속된다. 그 밖에도 기계가 도입되면서 많은 영역들에서 인간의 노동력을 필요 없는 것, 아니면 기계를 보조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컨베이어 벨트 노동의 산업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해외에 있는 국가들, 주로 남북 아메리카에서 노동력을 이미 충분히 수입한 상태였고, 또 농업에서도 점점 더 사람 대신 기계가 일을 하게 되면서 노예를 계속 감시하거나 폭력까지 동원해서 수입해오는 것이 쓸데없이 비싼 돈을 들이는 일이 되었다. 인간이 ‘자발적으로 번식하고 밥벌이를 위해 자기 자신을 팔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 합당한 것으로 여겨졌다.

아프리카에서는 영국 사람들이 대륙 남쪽에 최초의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을 도입하여 식민 지배를 관철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면서 1652년에 이미 무역의 거점인 케이프타운을 건설한 네덜란드 출신의 보수적인 백인들을 해안 지방에서 내륙 지방으로 쫓아보냈다. 이런 갈등이 깊어지다가 마지막에는 영국 사람들과 네덜란드 출신 백인들 사이의 전쟁으로까지 확대되어서 1899~1902년에 그들은 그곳의 지배권을 놓고 싸웠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남아프리카에서 영국계 백인과 네덜란드계 백인(보어인) 사이에 눈에 보이는 갈등을 남기고 있다. 영국 사람들은 남아프리카를 포함하여 자기들이 점령한 아프리카의 모든 지역에서 세 가지 자본주의 원칙을 고집하였다. 모든 식민지는 자급자족할 것(영국은 비용을 들이지 않는다), 영국에 원료를 공급할 것, 영국의 상품을 살 것 등이다.

영국 사람들과 네덜란드 출신 백인들은 각기 여러 아프리카 종족과도 싸웠다. 특히 줄루족과 코사족과 싸움을 벌였는데, 이 아프리카 종족들은 자기들끼리도 서로 적대 관계에 있었다. 영국 사람들은 필요하면 폭력을 써서라도 ‘남아프리카의 조각 양탄자’를 영국 깃발 아래 연방으로 통합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혔다.

코사족과 줄루족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오랜 갈등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문화가 공통으로 귀하게 여기는 유일한 부유함, 곧 가축을 기를 목초지를 차지하려는 갈등을 많이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이곳에서는 소를 기르는 게 상당히 발달되어 있었다. 줄루족의 두 지도자와 그들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영국 사람들과 갈등을 벌인 이야기를 통해, 맨 처음의 만남과 저항을 거쳐 마침내 아프리카 사람들이 현대 무기의 우세함에 밀려 굴복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샤카줄루: “언제나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라.”

“줄루족에게는 살아 있을 때 이미 유명한 전설이 된 지도자가 있었다. 여러 갈래로 갈라진 줄루족을 통합함으로써 줄루 민족의 창시자로 여겨지게 된 샤카줄루(Shaka Zulu, 약 1786~1828년)가 그 사람이다. 결혼하지 않은 남녀 사이에 사생아로 태어났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줄루 종족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새로운 전투 방법을 도입하여 젊은 시절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스물네 살 때 줄루 종족 중에서 최고의 전사들인 부텔레지 종족의 도전을 받아들여 스스로 고안해 만든 짧은 칼 아세가이를 이용해 승리를 거두었다. 그의 칼은 전통적인 창보다 더 나은 무기임이 밝혀졌다. 그는 이때부터 전사로서의 경력을 시작하여 1815년부터는 단순한 군사 지도자가 아니라 모든 줄루족의 왕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거대한 줄루 왕국을 건설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유럽 사람들이 줄루족의 땅 깊숙한 곳으로 들어오기 오래전에 샤카줄루는 명령에 따르지 않는 소토족과 은데벨레족을 쫓아냈다. 그의 전술은 전통적인 전투 방식 대신 군대 일부가 앞에서 달려드는 동안 깜짝 놀라는 적을 다른 두 군대가 측면에서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모든 줄루를 통합한 왕으로서 그가 맨 처음 행한 일은 결혼하지 않고 자식을 낳았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멸시한 사람들에게 복수를 한 것이다. 그는 어머니에게 ‘여자 코끼리 대장’이라는 직함을 주고 어머니에게 부당한 일을 했던 모든 사람을 죽이게 했다. 그리고 자신을 기억하도록 그사이 포르투갈 영토가 된 자신의 왕국에 ‘불라와요’ 라는 이름의 새 도시를 세웠다. 이것은 ‘죽음의 장소’라는 뜻이다(오늘날에는 짐바브웨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의 이름이다).

1823년에 한 젊은 코사 사람이 샤카줄루에게 백인들 한 무리가 그를 방문하러 해안 지대를 떠나 이리로 오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 보고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샤카는 코사족에 대한 그때까지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이 젊은이에게 높은 직위를 주어 보답하였다. 12개월쯤 뒤에 영국 해군 소위 프랜시스 페어웰(Francis Farewell)과 상인인 헨리 핀치(Henry Fynch), 그리고 나중에 이 두 젊은 남자와 합류한 청년 너새니얼 아이삭스(Nathaniel Isaacs) 세 사람이 불라와요에 들어왔다. 그들은 자기들이 영국 왕 조지의 사절단이라고 소개했지만, 사실은 가능한 한 빨리 부자가 되려는 건달들에 지나지 않았다.

샤카줄루는 그들의 말을 믿고 영국 왕에게 보내는 선물을 넘겨주었다. 자기 종족 출신의 정치적 적들에 대해서는 수많은 잔학 행위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도, 샤카는 이 낯선 백인들에게 ‘언제나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세 사람은 줄루족 지도자의 친절을 거침없이 악용하였다. 헨리 핀치는 ‘나탈 왕’이라고 멋대로 자처하고 수많은 줄루족 여인들을 후궁으로 삼았다. 그와 아이삭스는 샤카줄루의 보호를 받으면서 자녀를 수십 명이나 두었고, 자기들을 비판하려는 많은 줄루 사람들을 때려죽이는 사형에 처했다. 그들이 앞뒤 가리지 않는 상아 무역을 시작하면서 줄루 땅에서 코끼리 숫자가 급격히 감소하는 바람에 케이프타운에 있던 영국 식민지 정부에서도 그 소문을 듣게 되었다. 핀치와 아이삭스는 자신들의 범죄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른바 일기를 출간하였는데, 여기서 그들은 자기들이 ‘잔인한 샤카줄루의 포로’였다고 주장하였다. 이 일기장은 오랫동안 줄루족에 대한 연구에서 ‘중요한 출전’으로 여겨졌다. 1941년에야 역사가들은 아이삭스가 핀치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을 발견하였다. 이 편지에서 아이삭스는 핀치에게 일기 기록을 위한 지침을 밝혔다. ‘줄루족 지도자들을 가능한 한 잔인한 인물로 묘사하고, 그들이 죽였다는 사람의 추정치를 제시하며, 그들의 목숨을 잃게 만든 뻔뻔스런 범죄들을 서술하라. 그러면 이 책을 더욱 포괄적이고 흥미로운 것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단 한 번도 유럽 사람들에 맞서 싸운 적도 없이, 샤카줄루는 1828년 줄루족 지도자가 되려는 이복형제 간의 칼에 찔려 죽었다.”

샤카줄루의 조카인 줄루족의 마지막 왕 케츠와요(Cetshwayo, 약 1826~1884년)는 아프리카 사람들로 구성된 군대로 유럽 세력에 맞서 드물게 군사적 승리를 얻은 사람이다. 1879년 1월에 그는 영국군에 맞선 전투에 병사 2만 명을 보냈다. 이 영국군은 1877년에 네덜란드계 백인들의 공화국인 트란스발을 합병하고 이어서 줄루 땅을 차지하려고 나선 군대였다. 그 이전에 영국 정부가 재빠른 행동을 취할 만한 결정적인 일이 있었다. 1867년에 남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엄청난 규모의 다이아몬드 산지가 발견된 것이다. 누가 장기적으로 이 다이아몬드 광산의 통제권을 가지느냐를 놓고 경쟁이 시작되었다.

줄루 왕 케츠와요: “나는 한 번도 당신들에게 부당한 일을 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내 나라를 차지하려는 것 말고 다른 목적을 갖도록 하라!”

“샤카줄루 이후로 50년이 지나서 줄루족과 영국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일로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처음의 적대감은 어느 정도 서로를 존중하는 자세로 바뀌었다. 정직한 사람과 음흉한 사람이 양쪽 모두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여러 경험이 가르쳐주었다.

케츠와요의 아버지로 줄루족의 왕인 음판데(Mpande)가 다스린 지 15년이 지났을 때 맏아들 케츠와요와 둘째아들 음부야지(Mbuyazi) 사이에 후계권을 놓고 공공연한 다툼이 벌어졌다. 왕이 둘째아들을 편애하는 바람에 이런 싸움이 불거진 것이다. 이 싸움은 1856년에 케츠와요 추종자들과 그 동생의 추종자들 사이에 일종의 내란 상태로까지 번졌다. 같은 해 음부야지가 죽으면서 싸움은 케츠와요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나탈에 있던 영국의 ‘토착민 담당’ 테오필러스 셉스턴은 케츠와요와 아버지를 화해시키기 위해 중재에 나섰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갈등을 끝내고, 왕은 케츠와요를 후계자로 인정하고 아들은 왕에 대하여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리고 케츠와요는 아버지가 1872년에 32년 동안의 통치를 끝내고 죽을 때까지 그 약속을 지켰다. 케츠와요는 마흔네 살에 왕이 되었다. 셉스턴은 영국 왕의 이름으로 공식적인 축하 인사를 하였다.

하지만 다이아몬드가 발견되고 나서부터 줄루족에 대한 영국 왕의 태도뿐만 아니라 셉스턴의 태도도 완전히 바뀌었다. 셉스턴은 런던에서 귀족 작위를 받고 남아프리카에서 ‘영국 연방 계획을 추진하는 임무를 맡아 1877년에 돌아온 다음에는 케츠와요 왕에 대한 태도를 싹 바꾸었다. 이때까지는 네덜란드계 백인에 맞서 줄루족을 지지하더니, 트란스발 공화국을 합병한 이후부터는 이 지역에서 영국이 지배권을 차지하는 데 줄루족이 마지막 남은 방해가 되었다.

줄루족에 대한 전쟁을 논의하던 영국 장교들은, 가나에서 아샨티족에게 승리를 거두고 또 남아프리카 이스트케이프에 있던 코사족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다음 ‘케츠와요의 오만함을 시험해볼 실질적인 조치들을 취하기로 결정하였다.

주로 영국 측에서 도전을 하여 줄루 땅 국경선에서 여러 번이나 중요하지 않은 전투가 벌어졌다. 그런 다음 영국은 1878년 12월 11일에 최종 선언을 하였다. 케츠와요 왕이 여러 가지 다른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20일 이내에 군대를 해산하지 않는다면 영국군이 들어가겠다는 선언이었다. 케츠와요는 다음과 같이 대응했다. ‘왕은 스스로 전쟁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며 공격받기를 기다렸다가 방어에 나설 것이라고 여러 번이나 말했다.

1879년 1월 22일 줄루족 군대는 암벽으로 이루어진 이슬란들라와에서 6킬로미터 떨어진 넓은 골짜기에 모여 그곳에 진영을 세웠다. 이곳에서 줄루족 대표들이 협상을 위해 영국 장교들에게 파견되었다. ‘무기가 아니라 말로 이 사건을 해결하도록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줄루-왕-케츠와요-샤카-줄루의-조카

그러나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족의 진영에 많은 곳에 영국 병사 822 명과 아프리카 용병 431 명으로 이루어진 영국 진영이 있었다. 물론 영국군은 근처에 우세한 줄루족이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하였다. 점심때쯤 말을 탄 영국 병사들의 작은 무리가 소 떼를 거느린 몇 명의 줄루 사람들을 만났다. 영국군은 이들을 쫓다가 몇 분 만에 언덕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수천 명의 줄루족이 골짜기에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깜짝 놀라 자신들의 진영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이때 줄루족 지휘관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영국군 진영을 둘러쌌다. 이른 오후에는 벌써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이것은 아프리카 땅에서 영국군이 겪은 최초의 패배였다. 겨우 병사들 몇 명만 도망칠 수 있었다.

영국군은 훨씬 우월한 무기의 힘을 빌려 7월 4일에 줄루족을 군사적으로 완전히 물리칠 수 있었지만 패배하지 않는 백인들이라는 신화는 이미 깨져 있었다.

케츠와요 왕은 도망을 쳤지만 나중에 붙잡혀서 케이프타운으로 보내졌다. 그는 고위층 인사들과 특히 빅토리아 여왕에게 도움을 간청하는 편지를 여러 장이나 썼다. 1881년에 그는 위에 인용한 구절이 들어간 편지를 케이프타운에 있는 영국 총독에게 보냈다. ‘나는 한 번도 당신들에게 부담한 일을 한 적이 없다… 1882년에 케츠와요 왕은 자유당 정치가들의 후원을 받아 영국으로 여행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줄루 민족의 붕괴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가 1884년에 죽었을 때 그의 왕국은 샤카줄루가 처음 시작했던 시절의 규모로 줄어들었다. 1897년에 줄루 땅은 완전히 영국 식민지로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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