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투사와 폭군: 권력과 권력의 남용

권력을 한 번 얻으면 개인의 이익을 위해 그것을 이용하고 그러면서 자기를 가로막으려는 사람들에게 온갖 잔인한 행동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아프리카만의 특성이 아니다. 누군가가 합법적으로, 예를 들면 자유 선거를 통해 권력을 얻었는지 아니면 이전의 권력자를 폭력으로 몰아내거나 살해하는 등의 불법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차지하였는지 하는 것은 부수적인 문제일 뿐이다. 누군가가 ‘위에서 꼭 필요한 경찰력이나 군사력을 얻게 되면 ‘아래로부터’ 제대로 작동하는 통제만이 독재 정치나 권력 남용을 막을 수 있다.

거의 모든 문화의 역사는 권력과 부유함을 차지하려는 욕망에서 자신의 민족을 극히 고약한 방식으로 착취했던 남자들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식민 지배에서 해방되고 처음 10년 동안 아프리카에는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지배자들이 압도적이었다. 첫째, 그들은 이전의 식민 지배 세력의 적극적인 후원이나 적어도 묵인 아래서 권력을 차지하였다. 둘째, 적어도 처음에는 각 국민의 보수적 엘리트 계층의 지원을 받거나 묵인되었다. 셋째, 모두가 남자들이었다.

세 번째 조건만은 진짜 해방 투사나 휴머니스트로 여겨지는 사람이나 관계없이 모두에게 해당된다. 남자, 남자, 남자… 폭군이거나 해방자이거나 상관없이 해방 후 처음 몇십 년 동안 아프리카의 역사에는 오로지 남자만 등장하였다. 몇몇 아프리카 나라들에서는 그 이후 여성 장관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여성 대통령이나 총리는 아직도 등장한 적이 없다. 그들은 앞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아프리카의 여성들은 전통적인 남성 중심 사회에서 자기들에게 주어진 침묵을 깨뜨리기 시작하였다. 여성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더 상세히 다루기로 한다.

유럽에서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의 보카사 황제나 우간다의 이디 아민 같은 미친 독재자들의 잔학 행위는 아프리카 정치 지도자의 ‘끔찍한 미숙함’의 일반적인 증거라고 쉽사리 여겨지곤 하였다. 그러면서 유럽이 배후에서 행한 역할에 대해서는 제대로 조명하지 않았다. 아프리카에서는 국내의 보수적 엘리트층이 자기들의 공동 책임을 자주 부인하였다. 특히 독재 정권이 무너지고 나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모두가 ‘전부터 이미’ 이 독재자에게 맞서왔던 것처럼 굴었다. 반대로―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더욱 불행한 일이었는데-아프리카 정부 지도자들에게서 보이는 인간적으로 정직하고 정치적으로 영리하고 개인적으로 겸손한 태도는 제대로 분석되지도 않았고, 제대로 알려지거나 자유를 향한 먼 길에서 꼭 필요한 노선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장 베텔 보카사와 이디 아민은 인간적인 권력 남용의 극단적인 예를 보여준다. 그에 반해 레오폴드 셍고르와 줄리어스 니에레레는 그와는 대비되는 인물들이고, 토마 상카라는 오류가 없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을 위한 더 나은 정의를 찾는 과정에서 정직한 모습을 보여준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장 베델 보카사

1977년 12월 4일 장 베델 보카사:

“나는 검은 아프리카에서 사회적 진화를 직접 실현한 사람이다. 중앙 아프리카 제국의 통치자인 나 보카사 1세 황제는.”

“장 베텔 보카사(Jean Bédel Bokassa, 1921~1996년)는 아프리카의 나폴레옹으로 역사에 등장하려고 하였다. 1977년 12월 4일 황제 대관식은 그의 소원에 따라 나폴레옹의 대관식 이후 정확하게 173년 만에 거행되었다. 이것은 그로테스크한 생각이었다. 노예 제도와 그 결과로 가장 많은 타격을 입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예전 식민지 주인인 프랑스가 대관식에 어울리는 장식품을 공급해주었다. 급도급을 한 독수리 모양의 옥좌(무게가 2톤), 황제 관(다이아몬드 2,000개가 박힌) 그리고 물론 강물처럼 많은 샴페인도 공급하였다. 이렇듯 품위 없는 구경거리를 위해 사용된 경비는 미국 달러로 약 2,000만 달러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랑스가 이런 연극 무대 같은 일에 말려든 것은 아마도 이 시기에는 자신들이 지배하던 아프리카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1960년부터 독립한 이 나라에서, 1965년에서 1966년으로 넘어가는 마지막 날 밤에 정부를 뒤집어엎고 통치권을 차지한 이 강한 남자에 대한 열광은 처음부터 벌써 몇 가지 상처를 지닌 것이었기 때문이다.

장 베델 보카사는 프랑스 군대에서 일반 병사로 경력을 시작하여 차근차근 위로 올라갔다.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이 독립한 지 4년 만인 1964년에야 보카사는 프랑스에서 고국의 군대로 자리를 옮겼다. 보카사의 사촌이던 초대 대통령은 곧바로 그를 참모총장에 임명하였다. 그것은 치명적인 오류였다.

1965년에서 1966년으로 넘어가던 마지막 날 보카사는 공격을 시작하여 사촌을 쫓아냈을 뿐만 아니라 1959년에 제정된 헌법을 곧바로 효력 정지시켰다. 이제 아무도 그를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수백 명의 정치적 적들이 긴 재판 과정 없이 곧바로 처형되었다.

그는 수도인 방기 바깥에 궁전을 지었는데, 오늘날에는 거의 다 무너져서 무성한 잡초로 뒤덮였지만, 그가 자신의 개인적인 원수들을 사자 먹이로 던져주곤 하던 사자 우리와 독사들을 길렀던 공간의 잔재만은 아직도 남아 있다.

보카사가 중앙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의 이익을 존중하는 한―그것은 주로 이 나라의 전략적 위치 때문에 중요하였다—프랑스 정부는 10년 이상에 걸쳐 가장 고약한 인권 침해의 수많은 사례들을 묵인하였다.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어쨌든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프랑스 편에 서서 나치 독일에 맞서 싸웠다는 것이다.

1972년에 스스로 종신 대통령이 된 보카사는 두 번의 쿠데타 시도와 한 번의 암살 시도를 무사히 넘기고 살아남았다. 그때마다 광란적인 학살이 뒤따랐다. 새로 독립한 리비아의 원수 무아마르 알 가다피(Muammar al-Gaddafi, 1942년~)가 그를 설득하여 이슬람교로 개종시켰지만 그는 대관식을 하기 전에 가톨릭으로 되돌아왔다.

1979년 초의 소요 사태를 그는 전과 똑같이 시민들에 대한 잔인한 학살을 통해 진압하였다. 1979년 4월에 초·중·고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는데 이때 100명의 학생들이 몽둥이에 맞아 죽었다. 기자들은 보카사가 스스로 몽둥이를 들고 어린이 학살에 참가한 모습을 보도하였다.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이 사건은 도를 넘는 것이었다. 마침내 프랑스는 보카사를 쫓아내는 것에 동의하였고, 그가 1979년 9월에 리비아의 가다피를 방문하고 있는 동안에 피를 흘리지 않고 이 일을 처리하였다.

보카사는 프랑스에서 안전한 망명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도 1986년에 그는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돌아와서 체포되어 대단히 감정적인 재판을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계속 새로운 잔혹 행위가 폭로되었고 그의 정권 아래서 살해된 사람의 숫자가 20만 명 이상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1987년에 그는 사형을 언도받았다. 1년 뒤에 당시 대통령 앙드레 콜링바(André Kolingba, 1935년생)가 사형을 종신형으로 바꾸었다. 보카사는 1993년에 일반 사면을 받아 석방되었고 1996년에 심장병으로 사망하였다.”

이디 아민

1972년 우간다에서 약 5만 명의 아시아 사람을 쫓아내기 전날 밤에 이디 아민

“우간다의 암소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그 젖을 짜려는 사람은 우간다에서 얻을 것이 없다.”

“이디 아민(Idi Amin, 1925~2003년)은 독재자로서 권좌에 오른 지 1년이 지났을 때 (꿈에서 신이 나타나 알려주었다고 하는데) 이 나라에 있던 소수 민족에 대한 조치가 자신의 권력을 안정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들 소수 민족을 경제 문제의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영국이 식민 지배를 하던 시절에 이 나라로 데려온 인도 사람과 파키스탄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중산층 상인 계층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힌두교도이거나 이슬람교도이거나 상관하지 않고 모두 90일 이내에 이 나라를 떠나라고 명령하였다. 그들은 트렁크 두 개에 50파운드까지 들고 나갈 수 있었다.

이디 아민은 1925년 이 나라의 북서부에 있는 소수 민족의 하나인 카라(KaKwa)족으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는 ‘동아프리카 라이플’이라는 영국 식민지 군대에서 근무하였다. 병사 시절 그는 헤비급 권투 선수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읽기와 쓰기를 겨우 할 수 있는 정도였는데도 일찍부터 이렇게 강력한 체력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얻었다. 상관들은 그가 ‘특히 양순한 사람이라고 서술하였다.

1962년 우간다가 영국에서 독립을 얻었을 때 이 나라는―2년 전 루뭄바의 콩고와 비슷하게 매우 다양한 종족 무리들이 뒤섞여서 폭발 직전의 상태에 있었다. 영국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일부러 이들이 서로 대립하게 만들었다. ‘간접 통치’라는 식민지 정책에 따라 가장 큰 종족인 간다(Ganda) 민족을 세금 징수인, 경찰, 관리 등으로 삼아 다른 모든 민족보다 우대하였다. 그래서 최초의 정부는 간다 민족인 카바카(왕) 무테사(Kabaka Mutesa) 1세를 대통령으로, 랑고 민족에 속하며 간다 민족을 미워하는 정당 정치인 밀턴 오보테(Milton Obote, 1924년~)를 총리로 삼았다. 독립한 지 4년 만에 오보테가 공격을 개시해서 간다 왕의 권리를 뺏고 그를 영국으로 쫓아냈다. 그는 1969년 죽을 때까지 영국에 머물렀다.

이 과정에서 이디 아민은 개인적으로 왕궁을 폭파하여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오보테와 아민의 병사들은 우간다 시민들을 끔찍하게 학살하였다. 오보테는 얼마 뒤에 아민을 군대의 명령권자로 임명하였다. 영국 사람들은 점점 커지는 원한을 품고 이 사태를 지켜보았다. 오보테는 거듭 부패 행위로 고발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테러를 통해 단독 정당 정권을 수립하였다. 영국 정부를 더욱 화나게 만든 것은 그가 영국 소유의 회사 몇 개를 국유화하고 인종 정책을 쓰는 로디지아와 남아프리카에 대한 불매 운동을 조직한 일이었다. 육군소장 이디 아민은 자신의 시간이 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슬람교도였는데도 불구하고 오보테의 배후에서 영국과 이스라엘의 외교적 후원을 얻었다. 이스라엘은 우간다를 거점으로 삼고 수단에서 정치적 불안을 일으키려 하였다. 1971년에 오보테가 외국 여행을 하고 있을 때 아민이 공격을 개시하여 오보테의 심복들을 죽인 다음 스스로 군사 정권의 수반이 되었다. 오보테의 공포 정치가 대부분의 우간다 국민에게 대단히 미움을 샀고 이디 아민은 정치가로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 캄팔라 사람들은 처음에 아민을 ‘곤궁에서 구원해준 사람’이라 여겨 환영하였다.

영국 정부는 우간다의 쿠데타에 개입한 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케냐와 이스라엘을 부추겨 그들이 먼저 아민을 국가 수반으로 인정하게 한 다음 영국도 그를 국제적으로 인정해주었다. 오보데의 추종자들을 제외하고, 하나의 독재가 더욱 나쁜 또 다른 독재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을 맨 먼저 알아챈 사람들은 아시아 사람들이었다. 아민은 처음에 영국과 이스라엘 측에 임시로만 권력을 가질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머지않아 그들이 필요 없으며, 이제부터는 이슬람 세계와 결속을 가질 것이라는 소식으로 자신을 후원해준 이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다시 리비아의 가다피가 아민을 설득하여 주민의 6퍼센트만이 이슬람교도인 우간다를 이슬람 국가로 만들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잘 왕은 손수 우간다로 여행하여 전국적으로 이슬람교 성당을 건축할 비용으로 수백만 달러의 자금을 대주었다.

아랍 세계의 후원을 얻은 아민은 이제 유럽 국가들의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오보테의 심복들을 죽인 다음 아민은 다른 종족 무리에 속하는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죽음의 기병대는 전국에 공포를 퍼뜨리고 판사와 주교들을 보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실종되었고, 고문으로 사지가 절단된 시체들이 강에 둥둥 떠다녔다. 사람들은 아민이 ‘우간다의 학살자’라고 뒤에서 수군댔다. 8년 동안의 공포 정치 동안 적어도 30만 명, 아마도 50만 명이 폭력으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측한다.

이전의 식민지 주인 그 누구도 이런 살상 행위를 끝내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그가 권력을 잡도록 도움을 주었던 영국과 이스라엘은 더욱더 움직이지 않았다. 아프리카 사람이 아프리카 사람을 죽이고 영국의 옛날 회사들은 어차피 잃어버린 것인데 무엇 때문에 나선단 말인가? 결국 젊은 요웨리 무세베니(Yoweri Museveni, 1944년~)의 지휘를 받는 우간다의 저항 투사들이, 줄리어스 니에레레가 통치하던 탄자니아 정부와 군대의 도움을 받아 1979년에 우간다에서 이디 아민을 쫓아냈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도망쳐서 2003년에 죽을 때까지 재판을 받지 않고 그곳에 살았다.

요웨리 무세베니는 이어지는 짧은 과도 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냈다. 망명지에서 돌아온 오보테는 1980년에 선거 부정을 통해 다시 권좌에 올랐다. 요웨리 무세베니는 덤불숲으로 돌아가서 오보테의 두 번째 테러 정권에 맞서 6년 동안이나 게릴라전을 펼쳤다. 오보테는 다시 적어도 30만 명의 시민들을 죽였다.

1986년 1월에 요웨리 무세베니는 자신이 거느린 국민 저항군과 더불어 캄팔라로 진입하여 얼마 뒤에 우간다의 새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게릴라전은 양측의 끝도 없는 폭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그래서 무세베니는 어린이 병사를 투입했다는 비난을 받는다—그래도 그는 우간다 사람들을 안정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처음으로 병사들은 기율을 갖게 되었고, 돈을 내고 식량을 샀으며, 곤궁으로 고통 받는 시민들을 돌보았다. 무세베니 정부는 오늘날까지도 독자적인 길을 가려고 노력하는데, 그것은 비난과 인정을 동시에 받는다. 비판자들은 우간다에 다수 정당이 없으므로 실제로는 민주주의가 없다고 말한다. 그의 정책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우간다가 독립한 이후 처음으로 다수의 주민을 위해서도 병원과 학교들이 생겨났으며, 언론의 자유가 있고, 각 지역별로 주민들이 직접 선출하는 위원들로 이루어진 풀뿌리 민주주의의 ‘저항 위원회’가 있음을 찬양한다. 요웨리 무세베니는 이것을 ‘아프리카 방식의 민주주의 모델’이라고 말한다.”

장 베텔 보카사와 이디 아민은 옛날 식민지 세력을 직접 경험하였지만 명령을 받는 입장이었다. 프랑스와 영국 사람들은 이들을―비록 ‘괴상한 특성을 갖기는 했어도ㅡ‘잘 다룰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에 비해 레오폴드 셈고르와 줄리어스 니에레레의 이야기는 새로운 유형의 아프리카 정치가를 보여준다. 그들은 처음으로 독자적인 정치 문화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늦게 젊은 토마 상카라도 ‘정직한 인간’을 위한 나라라는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하였다. 옛날 식민 지배 세력은 여기서 새로운 동반자가 되거나, 프랑스가 세네갈의 셈고르에 대해 했던 것처럼 가장 좋은 의미에서 무관하게 되고, 동시에 다른 나라들과 그런 것처럼 독립적인 국제 관계를 맺었다.

레오폴드 셍고르

“우리의 확신은 프랑스 사람들이 우리에게 신뢰할 만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1959년 6월에 세네갈에서 레오폴드 셍고르

“레오폴드 세다르 셍고르(Léopold Sédar Senghor, 1906~2001년)는 1906년 다카르 남쪽 작은 어촌에서 귀족 출신의 부유한 상인 아버지와 유목민인 페울 종족에 속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네갈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그는 장학금을 받아 스물두 살 때 공부하러 파리로 떠났다. 뒷날 프랑스의 총리(1962~1968년)와 대통령(1969~1974년)이 되는 조르주 퐁피두(Georges Pompidou, 1911~1974년)가 젊은 날 그의 대학 친구 중 하나이다. 1932년에 셈고르는 프랑스 국적을 얻고 1935년부터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프랑스군에 입대한 그는 전쟁 중에 포로로 붙잡혀 18개월 동안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지냈다. 여기서 그는 독일어를 배우고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석방된 다음 그는 아프리카 언어 교수직을 얻었다.

1945년에서 1958년 사이에 셍고르는 프랑스 국회에서 세네갈을 대표하는 국회의원 노릇을 하였다. 1947년에 그는 세네갈에 ‘민주 세네갈 블록당(BDS)’을 설립하였는데, 처음으로 다양한 민족 무리와 가난한 주민 대표가 여기 모였다. 그 밖에도 그는 새로운 아프리카의 자의식 이념을 주장하는 ‘아프리카 문화 전통주의’ 소속 작가 겸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작품들도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는 앙드레 지드, 알베르 카뮈, 장 폴 사르트르 등 당대의 대표적인 프랑스 문인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1958년에 그의 담은 사회주의자와 연합하여 ‘세네갈 국민 연합 정당을 이루었다. 세네갈의 독립은 조심스럽게 준비되었고, 1959년에 말리와 연방을 형성하였다. 1960년 4월 4일에 말리 (옛날 프랑스령 수단)와 세네갈(이 나라에 있는 가장 큰 강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은 프랑스에서 독립하였다. 1960년 8월에 평화적으로 독립을 이룬 세네갈은 그 이후로 독자적인 길을 성공적으로 가고 있다. 레오폴드 셍고르는 1980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브드 디우프가 다음 20년 동안 관용(톨레랑스)과 민주주의 정책을 계속 이어갔다.

세네갈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평화로운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물론 여기에도 다양한 종족 무리와 종교들이 있다. 세네갈은 대서양 연안에서부터 300킬로미터나 길게 세네갈 내륙으로 자리 잡은 감비아와 한 번도 갈등을 겪지 않았다. 오히려 1982년 이후로 두 나라에 경제적 이익이 되면서도 각자의 독자성을 확보해주는 연방을 이루었다. 가톨릭교도인 셈고르는 처음부터 주민의 90퍼센트에 달하는 이슬람교도에 대해 상호 존중의 정책을 펼쳤다. 그는 다양한 종교적·종족적 출신 장관들과의 개인적인 친분과 협동의 예를 보여주었다. 셍고르는 1968년에 독일 서적상인 협회가 주는 평화상을 받았다. 그리고 1983년에는 아프리카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명성이 높은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으로 뽑혔다.

그러면서도 그는 단 한 번도 아프리카 문화 전통주의와 아프리카 사회주의 이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아프리카 사람이 다른 대륙의 문화와 대화를 해야 하지만 그래도 독자적인 길을 찾아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또한 사회주의 기본 이념이 아프리카에는 매우 소중한 것이라 여겼다. 언젠가 그가 말한 것처럼 ‘옛날부터 나눔의 이념이 아프리카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회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는 자의식을 지니고 비판을 할 수도 있었다. 세네갈이 독립하기 전인 1959년 7월에 그는 프랑스가 독립 이후의 시기에 세네갈과 결실이 풍부한 협조를 할 책임감을 가질 것을 촉구하였다. ‘우리는 프랑스에 대한 우리의 신뢰가 우리에 대한 프랑스의 신뢰를 전제로 한다는 생각을 감추고 싶지 않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계속한다. ‘나는 프랑스 사람들이 오류를 범한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그들은 훌륭한 자질도 가지고 있다. 이 얼마나 경탄할 만한, 그러면서도 실망을 주는 민족인가. 얼마나 유혹적이면서도 화나게 만드는 사람들인가! ….. 그들은 이익보다 존경심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들은 남들이 자기들을 사랑한다고 말해야 할 만큼 사랑받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실에 근거한 확고한 비판을 하면 그들은 이성과 인간성의 이유에서 진실에 고개를 숙인다.’

레오폴드 셍고르는 프랑스 여성과 재혼하였고, 2001년에 아흔다섯 살의 나이로 프랑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줄리어스 니에레레

줄리어스-니에레레

1964년 11월 탄자니아에서 줄리어스 니에레레: “인류 전체를 끌어안을 능력을 가질 것”

“줄리어스 니에레레(Julius Nyerere, 1922~1999년)도 귀족 집안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탄자니아 북서부에 있는 민족인 자나키의 족장이다. 그는 이곳 빅토리아 호숫가 마을에서 1922년에 태어났다. 셍고르처럼 줄리어스 니에레레도 고등학교를 마치고 교사 교육과 3년 간의 실습을 마친 다음, 장학금을 받아 유럽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의 경우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다음 옛날 독일 식민지였던 이 지역을 넘겨받았다. 니에레레는 1954년에 서른두 살의 나이로 당시 탕가니카로 돌아와서 타누당(탕가니카 아프리카 국민 연합)이라는 정치적인 정당을 설립하였다. 타누의 이념은 사회주의의 방향을 취하고, 다양한 민족들이 통합을 이루도록 해주는 독자적인 아프리카 노선을 만드는 것이었다.

1959년과 1960년 민주적인 선거에서 타누담은 확실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 다음 1961년에 이 나라는 평화적인 정권 이양을 통하여 독립하였다. 줄리어스 니에레레는 1962년에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탕가니카 앞쪽에 자리 잡은 잔지바르 섬은 1890년에 이미 영국 사람들이 독일 황제에게 발트 해에 있는 헬골란트 섬을 내주고 맞바꾼 곳인데, 이곳도 1963년에 독립하였다. 1년 뒤에 탕가니카와 잔지바르가 합쳐져서 니에레레 대통령이 이끄는 탄자니아 공화국이 되었다.

줄리어스 니에레레는 아프리카 사회주의 이념을 갖고서 지치지 않고 용감하게 이상(理想)을 위하여 노력한 결과 아프리카 전체에서, 또한 국제적으로도 많은 인정을 받았다. 불행하게도 경제적으로는 오랫동안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새로운 탄자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이념은 ‘우야마'(Ujamaa, 스와힐리어로 ‘가족 공동체)였다. 탄자니아에 있던 120개(!)의 서로 다른 민족들은 종족이나 그 밖의 사회적인 출신 성분과는 무관하게 농업을 위해 만든 우야마에서 평화롭게 함께 사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독립적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독립적인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는 1964년에 ‘우야마 이념’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우야마는 우리의 사회주의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것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바탕으로 재미(Fun)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자본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리고 우야마는 인간들 사이의 갈등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즐거운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제도화된 사회주의와도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 아프리카는 그런 사회주의로 안내를 받거나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는 오늘날의 우리를 만들어낸 우리 전통 사회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것이기에……우리 모두에게 ‘가족’이란 장기적으로는 우리의 개인적인 가족을 넘어서고 종족 무리를 넘어서고 나라를 넘어서고 대륙을 넘어서서 전체 인류를 끌어안을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탄자니아는 오늘날까지도 식민 지배자들의 언어가 아니라 아프리카 언어인 스와힐리어를 공식적인 국어로 선택한 아프리카 유일의 국가이다. 물론 영어는 공공생활에서 광범위한 역할을 하고 있다. 줄리어스 니에레레 자신이 《성서》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스와힐리어로 번역하고, 스와힐리어로 된 문학의 촉진을 개인적인 중요 관심사로 여겼다. 교육을 위한 그의 활동은 이 나라에서 사랑이 넘치는 애칭인 ‘음왈리무’라는 이름을 그에게 주었다. 그것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다른 아프리카 나라의 독립 운동을 후원하였다. 그리고 1978년에서 1979년 사이에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을 쫓아내기 위하여 손수 무장하고 우간다의 저항 투사들을 도와주었다.

구(舊)소련, 중국, 쿠바 등의 후원을 받아서 1967년에 과격하게 시작된 우야마 마을의 농촌 개혁은 서방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국제적으로 많은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산업화를 소홀히 한 채 농업 중심의 개혁만으로는 점점 심해지는 나라의 빈곤을 막을 수 없게 되자, 니에레레는 공개적으로 이것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고 1985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때까지 아프리카에서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그가 이미 시작했던 조심스런 시장 개방은 후계자인 알리 하산 음위니 (Ali Hassan Mwinyi, 1925년~)에 위해 계속 추진되고 있다. 줄리어스 니에레레는 1990년까지 타 의장으로 있으면서 1999년 죽을 때까지 평화를 전파하는 일과 난민 문제의 해결을 위해 헌신하였다.”

토마 상카라

“우리는 미래를 고안할 것이다!”

1983년 서른세 살로 오버볼타의 새 대통령이 된 토마 상카라는 1년 뒤에 나라 이름을 부르키나파소, 곧 ‘정직한 사람들의 나라’라고 고쳤다

“실미 모시(Silmi-Mossi)족인 그의 부모는 어린 토마(Thomas Sankara, 1949~1987년)가 장차 가톨릭 사제가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기타 연주와 오토바이 타기를 좋아하던 이 젊은이는 고등학교를 마친 다음 장교 훈련을 받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음악을 그만두지 않았고 초기에는 주로 ‘투타쿠 재즈’ 밴드의 한 사람으로 인기를 얻었다.

스물일곱 살 때 훈련소 지휘관으로 승진하여 젊은 장교 블레즈 콩파오레(Blaise Compaoré, 1951년~)와 친구가 되었다. 이들은 함께 ‘공산주의 장교들의 그룹’을 뜻하는 비밀 조직 ROC를 결성하였다. 이것은 서부 아프리카에 인구 약 800만 명을 가진 보수적인 오버불타에서 부패에 저항하고 정의를 위해 헌신하려는 모임이었다.

젊은 장교들은 처음에 기존의 정부 안에서 영향력을 얻으려고 하였다. 토마 상카라는 정말로 1981년에 서른 살의 나이로 정보부 차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각료 회의에 처음으로 참가하면서 도전적인 뜻으로 자전거를 타고 갔다. 반년이 지난 다음에 넌더리가 나서 정부의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정부가 국민을 속박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고 선포하였다. 그 후 몇 달 동안 여러 번이나 폭동이 일어나고 그 중 일부는 유혈 사태로 발전하였다. 새로운 군사 권력자는 빈곤층에서 인기가 있던 이 젊은이를 1983년 1월에 잠깐 동안 총리로 임명했다가 5월에 해임하고 가택 연급시켰다. 토마 상카라를 지지하는 항의 시위가 이어졌다. 1983년 8월 초에 그의 친구인 블레즈 콩파오레가 리비아의 후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키고 토마 상카라를 오버불타의 새 대통령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엄청난 기대를 받았으며, 몇 가지는 기대 이상으로 실천하였다.

처음부터 그는 말과 행동을 일치시켰다. 이런 일은 아프리카 안이나 밖의 어떤 정치가도 실천한 적이 거의 없는 일이다. 그때까지 정부에서 사용하던 모든 호화로운 리무진을 팔아버리는 것도 그가 맨 먼저 한 일에 속했다. 그는 장관들이 의무적으로 당시 오버볼타에서 가장 가격이 싼 르노 5를 관용차로 사용하게 만들었다. 그의 특별한 정치적 관심은 풀뿌리 민주주의 사회를 만드는 것과 여성과 청소년의 권리를 강화하는 것, 그리고 교육과 건강을 위한 체제를 만드는 것 등이었다.

그는 이 나라 각 지역 추장이 주민에게 부과하는 강제 세금과 노동을 금지하고 그 대신 풀뿌리 민주주의 사상에 따라 선출된 ‘혁명을 옹호하는 인민 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는 무장의 권리도 가졌다. 그의 정부에서는 오늘날까지 아프리카의(유럽도!) 그 어느 나라보다 많은 여성들이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는 전통적인 할례와 여러 여성과의 결혼을 금지하고 피임을 선전하였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여성들로만 구성된 부대가 그의 경호대로 임명되었다.

그의 혁명 1년 만에 오버불타는 모시와 듈라(Dyula)어로 ‘정직한 사람들의 나라’라는 뜻인 부르키나파소(Burkina Faso)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그 밖에도 새 국기와 토마 상카라가 직접 쓴 국가도 있었다. 이 나라는 처음부터 쿠바와 소련 같은 공산주의 정부의 지지와 후원을 받았지만 서방의 정치가들도 ‘부르키나파소의 기적’을 오래도록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1984년에 이 나라 역사에서 처음으로 250만 명의 어린이들이 예방 접종을 받았다. 1985년에 북쪽으로부터 사막이 점점 더 넓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1,0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토마 상카라는 자기가 통치하는 작은 나라를 훨씬 넘어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라고 불렀다.

1985년 말에 그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지 않은 불행한 사태가 발생해서 뜻밖의 결과를 가져왔다. 정부의 위임을 받고 인구 조사를 하던 사람들이 실수로 이웃 나라 말리의 마을과 진영으로 들어갔다. 말리 정부는 이것을 도발로 여겼고, 전부터 어느 정도의 갈등이 있었던 두 나라에게는 이것이 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1985년 크리스마스에 시작되어 며칠 동안 계속된 이 전쟁은 1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오늘날에도 부르키나파소에서 ‘크리스마스 전쟁’이라 불리는 이 갈등을 통해 토마 상카라의 정부 내부에 있던 갈등이 불거져 나왔고, 여기에는 오랜 친구인 블레즈 콤파오레도 관련되어 있었다.

세계는 부르키나파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점점 더 커지는 경탄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1987년에는 전국적인 문맹퇴치 운동이 벌어졌다―블레즈 콩파오레를 중심으로 한 작은 무리가 1년 반 뒤에 토마 상카라의 몰락을 준비하였다. 그가 닥쳐오는 위험을 의식하고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987년 10월 15일에 그는 자기가 믿는 부하들 12명과 함께 잡혀서 같은 날로 총살을 당하였다. 그 살인자들은 그의 시신을 이름도 적지 않은 채 땅에 파묻었다. 블레즈 콤파오레는 스스로 부르키나파소의 새 대통령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그 자리에 있다. 쿠데타의 이유 중에는 토마 상카라가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를 위험하게 만들었다는 것도 있었다.

전국적으로 여러 개의 ‘인민 위원회’가 새 정부에 반대하고 국민 다수가 존경하던 토마 상카라에 대한 유대를 나타내기 위해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아프리카 안팎의 수많은 나라들에서 이 젊은 이상주의자의 죽음을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이름도 적지 않은 그의 무덤이 나중에 수도 29구역에서 발견되었다. 익명의 상카라 추종자들이 비석을 세우고 소박하게 ‘토마 상카라 대위’라고만 새겼다.

그의 살인자이자 후계자인 블레즈 콩파오레는 스스로를 ‘혁명의 구원자’라고 부르지만 상카라의 꿈은 거의 아무것도 실현되지 않았다. ‘정직한 사람들의 나라’의 주민들은 오늘날에도 평균 수명이 마흔네 살에 지나지 않고, 남자의 70퍼센트와 여자의 90퍼센트가 읽고 쓸 줄을 모른다.

토마 상카라의 소박한 무덤은 해마다 사람들이 새로 칠을 하고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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